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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삼오 Oct 01. 2024

용감한 형제

캐나다에서의 첫 주말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오늘도 학교에 갔겠지. 한국이었다면 일찍 하교하고 친구네 집에 우르르 모여서 AFKN채널 틀어놓고 레슬링 보고 있을 텐데. 많은 추억을 안겨준 미국 프로레슬링, WWF다. 워리어가 알통 터져서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고 사실이라며 버럭버럭 우겼던 놈이 있지를 않나, 미스터 퍼펙트 발차기 한다고 착지 잘못해서 병원신세를 진 녀석이 있었는가 하면, 빅보스맨은 진짜 경찰이네 아니네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던... 지금은 '거의' 본고장에서 시청하기를 기대하는 나로서는 참, 격세지감이다. 아, 그런데, 아직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티브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을 보니 테니스장 앞에 아이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야구 배트랑 정체 모를 막대기(하키 스틱)를 들고 있는 애들도 보이고, 그냥 잔디밭에서 뒹굴뒹굴하는 애들도 보였다. 도저히 심심해서 안 되겠다. 옆에 가서 노는 거나 구경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난 숫기제로에 먼저 다가가서 같이 놀자고 절대 말 못 하는 성격이다. 요새로 말하자면 극 "i"인 셈이다.



아이들 무리 근처로 다가갈수록 조금 더 정확한 비주얼과 오디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핏 보았을 땐 여기나 한국이나 애들 노는 건 다 비슷하다고 느꼈다. 남자아이들, 여자 아이들 골고루 있었는데 낯이 익은 얼굴도 있었다. 이사벨 아주머니 큰 딸, 현지 누나, 그리고 얼핏 봐도 한국 사람 같아 보이는 아이도 둘이 있었다. 형제인 듯했다. 한 명은 딱 봐도 큰 덩치에 선하게 생긴, 나보다 형인 게 분명했다. 다른 한 명은 나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엄청 뚱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렇다 이 아이는 캐나다에서 나의 '첫'친구가 된다.



현지 누나가 형제를 소개한다. "여기는 형 안성준, 얘는 안경준이야. 잘 지내봐. 아, 나는 약속 있어서 가본다." 누나는 이 형제랑 별로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성준이 형이 반갑게 인사했다. 경준이는 마지못해 겨우 인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되게 쌀쌀맞네...'이게 이 녀석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알고 보니 둘 다 내가 다니게 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성준이 형이 학교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 준다. 정말 친절한 형이다. 그런데 살짝 박찬호 모드로 진입하고 있었다. 결국 첫날, 이 형과 가족에 관한 이것저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민 온 지는 3년 가까이 돼 가는데 처음엔 몬트리올, 그다음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밀턴에 살았다고 했다. 해밀턴에서는 정말 많은 놀림과 따돌림이 있었단다. '억새 바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형과 경준이가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과 정말 많이 싸웠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아니다. 싸웠다기보다 놀리는 애들을 흠씬 두드려 패줬다는 얘기였다. 앞뒤가 안 맞는다. 성준이 형은 덩치는 컸어도 전혀 누구를 때릴 법한 인상이 아니었다, 경준이면 모를까. 그러나 몰랐던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성준이 형은 평소에는 천사지만 한번 제대로 화가 나면 헐크로 변신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부모님은 단지 인근에서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주로 먹는 게 샌드위치라 이젠 너무 질렸다고 한다. 부모님은 한국에서 같은 직장, 대한항공에서 근무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형은 중학교에 갖 진학했을 때 이민을 왔단다. 얼마 다니지도 않은 학교에 대해서 이것저것 얘기 해줬는데, 도대체 뭐 대수길래 그렇게 얘기하나 싶었는데 휘문중에 다녔단다. 그 유명한 강남 8 학군, '강남 패밀리'였다. 형은 내심 우리 가족은 강남에서 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나 보다.



형은 나에게 이런저런 TMI를 풀어놓다가 갑자기 혼자 놀고 있는 경준이에게 외친다. "야! 얘 데리고 밥 먹을 러 가자!" 엥? 갑자기? 어디로? 부모님이 하시는 샌드위치 가게로 가자고 했다. 걸어서 10분? 가는 내내 형은 이 얘기 저 얘기를 해줬지만 무엇에 대해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 한국말로 대화하는 게 그리웠을까? 가만 보니 경준이는 형에게 계속 영어로, 형은 한국어로 대화했다. 희한한 풍경 아닌가? 둘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데 통하는. 훗날 나도 내 동생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지만.



매장에 들어섰다. 넓지는 않았지만 길쭉한 형태에 좁은 테이블이 몇 개 있었다. 마치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마냥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잘 왔다! 저기 앉아있으렴. 맛있는 거 해줄게." 경준이는 어머니가 있는 맞은편 카운터로 가서 뭐라고 뭐라고 계속 얘기한다. 대충 들어보니 그냥 단순한 일상에 대한 대화였다. 신기할게 아니지만 난 신기해 보였다. 형은 경준이가 어머니와 대화하느라 한눈이 팔려있자 나에게 경준이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성질도 더럽고 잘 삐지기도 삐진다고. 또 고집은 더럽게 세다고,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니라는 모순적인 끝맺음이 있었다.



잠시 후 아주머니가 샌드위치를 한 상(?) 가득히 들고 오셨다. 모양이 독특했다. 바게트 비슷한 모양의 빵에 안에는 이것저것 푸짐하게 담겨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먹어본 샌드위치는 확실히 아니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신세계다. 처음 먹어본 맛이다. 그냥 맛있었다. 빵보다 햄이 더 많이 씹혔다. 벽에 붙어있는 샌드위치 포스터를 보니 빵 두께보다 더 많아 보이는 햄과 다른 것들이 눈에 띄었다. 형은 이런 걸 매일 먹는데 불평을 했다. 나로서는 이해 불가였지만 그냥 '밥'이 그리운 것일까?



반쯤 먹었을 때 아주머니가 추가 토핑으로 베이컨을 구워오셨다. 바쁜 게 어느 정도 정리 되셨는지 자리에 함께 하셨다. 웃는 얼굴로 나에 관한 것들을 물어보셨다. 한국에서는 어디서 살았니, 부모님은 뭐 하셨니,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니, 좋아하는 건 뭐니... 아주 디테일한 인터뷰를 마칠 때쯤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인사를 드렸다. 전형적인 무뚝뚝한 한국 아저씨였다. 정확히 두 형제를 반 씩 닮으신... 이 아니고 형제가 아버지의 모습을 반 씩 똑 닮은 모습이었다. 유전자의 힘은 역시 대단하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가게를 나섰다. 형이 집에 놀러 오란다. 집으로 가는 길에 경준이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 아이도 나처럼 시동을 걸고 예열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 거 같다. 나에게 학교 처음 가면 정신 바짝 차리란다. 누가 무시하거나 놀리는 거 같으면 철저히 응징(?)하란다. 흠, 우선 나중일은 나중에 걱정하기로 했다.



집에 들어서니 우리 집과 구조가 많이 달랐다. 꼭대기 층이라서 전망이 확 트인 느낌이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 티브이, 게임기랑 게임 팩들이 보였다. 형이 게임하자며 오락기랑 티브이를 켠다. 오호, 드래곤볼이다. 그런데, 싸우는 게 아니고 스토리가 있는 퀘스트 타입의 게임인 거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왜냐고? 100% 일본어였다. 형한테 일본어 할 줄 아냐고 물어봤는데 하도 많이 해서 대충 감으로 다 안다고 했다. 역시, 즐거우면 뭐든 금방 배운다. (내 친구 중에서도 일본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일본어를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던 아이가 있었는데, 훗날 일본어 동시 통역사가 된다.) 형제가 같이 쓰는 방에 가본다. 온갖 포스터들과 그림들이 벽에 붙어있다. 직접 그린 그림들 같은데, 입이 쩍 벌어져다. 너무 잘 그렸는데 형이 거의 다 그린 거란다. 중학생이 이걸 그렸다고? 와.... 형은 훗날 진로에 대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미대에 진학 안 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다.



경준이는 포스터들을 보여주면서 설명해 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란다. 자기가 응원하는 몬트리올이 이번 시즌 스탠리컵을 (챔피온)우승했다고 자랑했다. 포스터에 있는 선수들이 신기해 보였다. 이 날을 계기로 나도 아이스하키에 관심을 갖게 되고, 푹 빠지게 된다.



월요일에 학교에 같이 가자고 한다. 아파트 1층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준이가 스쿨버스는 칼 같이 오니 늦지 말라고 당부했다.





앞으로 경준이와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해프닝에 많이 엮이게 된다.


지금은 연락이 끊겼는데, 나의 '첫' 친구가 가끔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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