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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삼오 Oct 04. 2024

천하무적 노랭이

드디어 첫 등교일, 들뜬 마음으로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제법 많은 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를 비롯하여 성준, 경준 형제, 남자 몇, 여자 몇, 다 합쳐서 여덟, 아홉 명쯤 되는 거 같았다. 얼마 후 버스가 온다. 진짜 영화에서 보던 노란색 버스가 앞에 멈춰 선다. 기사님과 학생들은 가볍지만 반가운 인사를 한다.



내부는, 매우 어두 칙칙했다. 냄새도 썩 좋지는 않았다. 악취는 아니지만 뭔가 케케묵은, 곰팡이 비슷한 냄새도 났다. 다행히 오래 탈건 아니란다. 20분 정도? 자리는 중간쯤 빈 곳을 택했다. 시트 곳곳은 뜯기고 찢어져 있어서 청테이프로 여기저기 때운 흔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 매우 매우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대화하는 소리, 웃음소리부터 정체 모를 동물 소리, 온갖 종류의 소음은 다 합쳐놓은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고차원의 소음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사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이들이 시끄럽건 말건 그냥 선글라스 끼신 모습으로 운전에 집중하고 계셨다.



승차감은 어떨까? 90년대 초반 한국 시내버스와 경운기 사이 어딘가의 애매한 포지셔닝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소음과 진동, 하지만 어떤 뭐가 와서 충돌해도 버틸 것만 같은 상당한 안정감을 동시에 주었다. 그렇게 학교까지 중간중간 멈췄다 출발을 몇 번 반복한 후,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학교에 도착. 교실 들어갈 때까지 그냥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이었다. 교실에는 수업 10분 전에 줄 서서 다 같이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반은 메인 건물이 아닌 간이 교실이었다. 각 학년에 두 반 밖에 없단다. 신기했다. 두 반? 한국에서는 기본 10반 이상인데... 확실히 나라 규모에 비해 인구가 적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교실로 들어선다. 경준이도 같은 반이다. 보아하니 한 반에 20명도 안돼 보이는데... 다행히 새로 온 친구라고 앞에 나와서 인사하고 이런 건 없었다. 그런데 아마도 사전에 다 조율이 된 게 아니었을까? 영어 못한다고.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내가 캐나다 오면서 알고 있는 영어는 알파벳 대소문자, I can't speak English, My name is..., 이 정도가 다였다.



수업을 조금 하고 얼마 후, 선생님이 뭐라 뭐라 하시더니 아이들이 갑자기 우르르 밖으로 나간다. 경준이가 눈으로 신호를 준다, 빨리 나가자고. 응? 갑자기 뭐지? 다들 운동장으로 향한다. 야구도 할 수 있게 뒤에 펜스가 쳐진 곳으로 행했다. 다른 반과 야구 시합을 하기로 했나 보다. 갑자기 웬 야구? 체육시간인가?



우선, 2주 후면 방학이란다. 이쯤 되면 초등학교는 그냥 놀자판이란다. 게다가 전년도, 현 메이저리그 챔피언이 다름 아닌 토론토 블루제이스란다. 아이스하키 인기가 최고인 도시지만 하도 우승을 못 해서... 이 와중에 야구팀이 우승을 한 것이다. 이러니 야구의 인기는 절정이었고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야구를 하는 분위기였다.



솔직히, 나는 야구팬은 아니어서 규칙도 잘 몰랐다. 심지어 야구방망이 한 번 못 잡아봤다. 그냥 어리둥절하게 구경만 할 뿐. 한참 구경하고 있는데 선생님이랑 어떤 아이가 타석으로 들어가라고 신호를 보낸다. 내가? 나보고 타석에 들어서라고? 말은 못 하고 보디랭귀지로 소통을 했다. '그래! 너! 빨리 타석으로!' 타석에 섰다. 헛스윙만 세 번, 깔끔하게 삼진 아웃. 차라리 잘됐다.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교실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꺼낸다. 아침에만 해도 봉투에 들어있던 터키 샌드위치는 쌩쌩했는데 여기 눌리고 저리 치이고 해서 다 찌그러져있었다. 다행히 주스팩은 안 터지고 무사했다.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다른 아이들은 어떤 걸 점심으로 싸왔는지 궁금했다. 샌드위치도 보였고, 스파게티, 과일, 샐러드, 푸딩, 젤리.. 뭐 이런 것들은 알겠는데 신기한 게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연필 정도 되는 길이에, 엄지 손가락 정도 굵기의 하얀 엿가락 같이 생긴, 그냥 얼핏 보면 진미 오징어채 같기도 하다. 이걸 여기저기 찢어서 재미난 모양을 만들어 흔들기도 하고, 장난을 쳐댄다. 그게 스트링 치즈라는 걸 한참 나중에 알았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흔히 보이지만 저 때만 해도 치즈일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점심을 어느 정도 먹고 난 후, 또 아이들이 밖으로 우르르 나간다. 뭐 이렇게 자주 나가지? 점심시간 절반은 무조건 교실 밖으로 나가야 한단다. 이 제 본격적으로 아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아무도 관심 안 가져 줬으면...'이라고 하자마자 어떤 아이가 반갑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레니'라는 흑인 아이였다. 흑인은, 실제로 처음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쿨버스에서지만 실제로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흠, 뭐랄까, 격하게 환영해 주는 인상에 매우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했다.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내 바로 옆에 경준이가 호위무사(?) 겸 통역관, 든든한 친구이자 형 같은 노릇을 한다. 레니에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라는 듯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반갑게 잘 지내자고 하는 거 같은데 저리 가라 할게 뭐 있냐고.



이튿날부터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나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는가. 인사를 했다. 그다음 계속 말을 걸어온다. 하아, 망했다. 그냥 인사 정도로 끝내주면 안 될까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지만 이 친구들은 아니었다. 반을 비롯해 학교 전교생이 400명(유치원에서 중학교 2학년) 정도밖에 안 돼서 그런지 신입생 한 명 한 명이 새롭게 여겨지는 듯했다.



혼자 '억새 바람'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다행이다. 아직은 그럴 조짐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앞으로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학교 생활도 잘해야지.' 하지만 계획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우선 나는 영어를 아예 모르기 때문에 *ESL반에 배정되었다. 나이가 조금 있으신, 자상한 듯 하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선생님이 종이 몇 장을 주셨다. Banana is yellow랑 Apple is red가 적혀 있었고 그림에 색칠을 하라는 내용 같았다. 왠지, 유치원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색깔도 영어로 몇 개 알고 있었다. 어떻게? 후레쉬맨 광팬이었다. 사촌형덕에 모든 후레쉬맨을 수차례 봤다. 거기에는 레드 후레쉬, 블루 후레쉬. 그린 후레쉬, 옐로 후레쉬, 핑크 후레쉬가 있지 않은가?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색은 정확히 알지..

하여튼 이런 거 몇 개 하고 다시 본 교실로 돌아갔다.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영어가 익숙치 않은 학생들이 모여 영어 기초를 공부하는 수업



첫 쪽지 시험을 봤다. 수학.. 이 아니라 산수 시험이었다. 시험지를 봤다. 장난이었다. 두 자릿수 뺄셈, 덧셈이었다. 순식간에 풀고 멍 때리고 있었다. 점수는 당연히 100점. 다행이다. 학교 생활 시작하자마자 뭔가 잘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억새 바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산수를 잘해서 형제가 주목받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조만간 방학이란다. 그리고 9월 초에 다시 등교라는데... 엥? 그럼 두어 달 조금 넘는다. 방학이 정말 길다고 신기해했다. 그러더니 경준이가 한마디 한다. "겨울 방학은 2주 정도밖에 안 된다." 아하, 그렇구나. 그냥 여기는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첫 2주간은 그냥 '깍두기'처럼 지냈다. 이런저런 행사로 공부 다운 공부를 했던 기억은 별로 없었다.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여기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안 때린다 와 학생들이 자기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한다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무엇을 해도 다 긍정해 주시는 분위기였다. 스포츠로 치자면 프리시즌이었던 셈이다. 원래 아무것도 모를 때가 가장 좋을 때 라고 하지 않던가. 아마 방학 2주간이 나의 가장 평화로웠던 학교 생활이 아니었나라고 생각해 본다.






불편했던 스쿨버스는 졸업 때까지 몇 년간 잘 타고 다녔다.


캐나다에는 (아마 미국에서도) 도로 위 4대 천왕이 있다. 구급차, 경찰차, 소방차, 그리고 스쿨버스. 이 네 종류의 차량은 절대 천하무적이다.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는 도로 위를 순식간에 모세의 기적을 연출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게 뉴스에 나올 정도로 감동스러운 순간인가 보다.) 시민의식도 있겠지만,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벌금에 교육을 이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쿨버스는 학생이 승하차 시 반대편 도로 할 거 없이 무조건 멈춰야 한다. 학생이 승하차 도중 차량이 이를 무시하고 지나간다? 엄청난 액수의 금융치료와 더불어 교육 이수, 면허 박탈, 이 외에 상황별에 맞는 처벌이 추가로 있다. (실제로 내가 타고 있었을 때 한 번 이를 무시하고 간 운전자가 있었다. 기사님이 정말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수첩에 바로 차종과 번호판 정보를 옮겨적으시는 걸 봤다. 그러고는 한동안 화를 못 가라 앉치셔서 계속 씩씩 거리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이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 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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