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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Dec 20. 2024

욕망을 말하는 철학자들

과연 누구의 욕망인가

욕망의 위치

모든 종류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결여의 자리는 보존되며 그러므로 욕망의 위치 – 꿈꾼 이의 욕망의 자리, 그리고 환자의 욕망의 자리 모두 – 는 손상되지 않는다. 꿈꾼 이의 결여는 환자의 욕망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꿈꾼 이의 결여는 환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결여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의 욕망을 경멸한다면 나는 그의 욕망이 내 안의 결여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내가 그로 하여금 내 안의 결여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면 그의 욕망은 사라질 것이며 그의 존재는 소멸될 것이다

욕망의 그래프에서  s(A)의 자리를 생각해 보자.  타자가 나에게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따라서 나는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이는 존재에 대한 열정passions for being"을 만족시킨다.

라캉은 환자의 존재에 대한 열정을 충족시키는 방법 - 이것은 동일시를 통하여 만족될 수 있다 - 을 찾기보다는 분석수행자가 자신의 manque-a-etre (존재의 결여 lack of being, 존재되기의 실패 failure to be, 존재에 대한 열망want-to-be)를 대면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환자를 보호하고 환자의 존재를 보증해주며 왜 그/그녀가 그곳에 있고 그/그녀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기표가 타자에 의해 제시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분석가는 분석수행자가 타자 안에서 이러한 기표의 부재를 대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 이것은 욕망의 그래프에서 S(/A)에 상응한다.

콜레트솔레Colette Soler가 「존재와의 관계 분석가가 행동하는 자리The Relation to Being. The Analyst's Place of Action」 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라캉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을 malheur de l'etre (존재의 불운, 존재의 불행)라고 부른다(E 615. 636). 어떤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을 불운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존재의 결여와 겨루어 그 너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도시 라스 베가스

 라스 베가스는 그야말로 욕망의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도시에서 예약한 숙소를 들어가려면 반드시 도박장을 거쳐야 한다. 도박장은 화려의 극치로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도박 만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와 공연 산업도 이 도시의 한 축을 담당한다. 저녁에는 분수쇼를 비롯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 시설도 여기저기서 욕망의 입을 벌리고 있다. 도시 전체가 욕망하는 거대 기관이다.  

욕구 능력의 대상

실천 이성의 어휘에서 소개할 또 하나 핵심적인 개념은 욕구 능력의 대상이라는 개념이다. 의지가 의무 그 자체에 외부적인 그와 같은 대상에 의해 규정된다면, 우리의 행동은 결코 정념적인 것 이외의 어떠한 것도 아닐 것이다. 욕구 능력은 우리 행동의 근거로서 복무한다. 그것은 (인간) 생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다:

생이란 한 존재자가 욕구 능력의 법칙에 따라 행위하도록 하는 그 존재자의 능력이다. 욕구 능력이란 그와 같은 존재자가, 그것의 표상들을 통해서 이 표상의 대상들의 현실성의 원인이 되는 능력이다. 쾌는 어떤 대상이나 어떤 활동이 생의 주관적 조건들과 합치하는 것의, 다시 말해 객관의 현실성과 관련해서… 그 표상의 원인성의 능력과 합치하는 것의 표상이다

욕먕의 변증법 

욕망이 요구의 고착으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운동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헤겔의 변증법과 다름.)

라캉의 셋째 욕망의 그래프에서 주체가 대타자에게 던지는 "당신은 무엇을 원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대타자가 "너는 무엇을 원하니?"라는 질문으로 응답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욕망의 변증법은 대타자의 결여/욕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주체의 욕망이 출현하는 과정이다

애도는 욕망의 탄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애도는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고 욕망은 상실을 통해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을 뜻하는 영어 'desire'는 '기대하다(await)', '원하다(want)'라는 의미가 있다.) 한자어 ''慾望

을 살펴보면 '欲'은 '欠'자가 뜻하는 '모자람' '결여' '부재'에서 그 일차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었고, '望'은 윗부분 '亡' 이 눈동자(臣)를, 아랫부분의 ''任은 언덕을, '月'은 멀리 떨어진 대상을 뜻한다. 따라서 '''望은 밖으로 나가고 없는 대상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형상이다. 따라서 욕망은 영어(desire)와 한자어(欲望) 모두 '결여' '부재'에서 나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욕망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삶의 원동력과 활력소로서 작용해 왔고, 반면에 알력과 불화, 전쟁의 원인으로서 인류와 함께해 왔다.욕망이란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얻거나, 싫어하는 무엇인가를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멀리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따라서 욕망은 무엇을 갖고 싶은 경우뿐만 아니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때에도 나타난다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은 토끼 사냥을 할 때 토끼는 '욕망의 대상'이지 '욕망의 원인'은 아니다. 욕망의 원인은 ? 방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욕망의 법칙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어요', '나는 그것을 회피할 수 없었어요', '그건 내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어요' 같은 주장들은 주체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cédé sur son désir)’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욕망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 그 어떤 것을 정의해보자면, 욕망은 '자연의 법칙'에,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는가’에, 혹은 '환경의 힘'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그래,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입장을 포기해야 해.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그 만큼의 가치가 있지는 않지. 특히 나는 말이야. 그러니 평범한 길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한다면. 거기서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양보의 구조라는 것을 당신은 확신할 수 있다

철학자들의 욕망 이론

최상의 욕망은 제어된 욕망이고 좋은 욕망은 절제된 욕망이다 (말렉 슈벨, 「욕망에 대하여)

홉스는 근본적인 심리적 동인이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굴레로 보았다. 칸트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유는 단지 이성적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욕망에 기반을 둔 모든 행동을 가언적 명령이라고 명명했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죽음, 법 그리고 욕망이다.(미셸 푸코)

쾌락은 인간행위와 구분되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을 완성시킨다. 반면 욕망은 인간행위의 동기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열망' 또는 '욕망'(öpesis, orexis)은 존재가 그 (존재론적) 목적을 아직 완전히 실현하지 못한 상태에서 존재를 특징짓는 긴장으로 정의된다.

욕구들은 운동과 관계된다. 욕구들은 운동에 의해 만족된다

헤겔은 욕망(Begierde)과 욕구(Bedürfnis)를 자기의식의 차원에서 처음으로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욕구는 타재(他在)의 정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의 정념 또는 결핍의 정념에 불과하지만, 욕망은 대상의 타재, 이 타재의 존립 일반을 지양하고 대상을 주체와 합일시키는 활동이다. 헤겔은 욕망을 기본적으로 자신을 위해 자신 이외의 것을 희생시키는 원초적 충동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피폐화시킨다든지, 타인을 소유하려는 사랑도 욕망의 과정이다.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헤겔에 따르면 욕망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위해 세계를 무화(無化)시키려는 원초적 충동이다.헤겔은 욕망을 노동의 과정을 거쳐야만 해소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욕구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생존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노동은 욕망의 발생 원인이자 충족과정이다. 이때 노동은 대상을 '없앰으로써 향유하는 것이다 헤겔은 노동을 '억제된 욕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가족에 속한 사랑과 욕망은 부정되고 지양되어야 할 속성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욕망을 윤리의 영역에서 추방한 것처럼, 헤겔도 욕망을 보편적 윤리적 질서를 위해서 부정되어야 할 가족의 속성으로 파악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이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대자)이면서 사물적 존재(즉자)이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있을 동안에는 결코 의식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물적 존재일 수는 없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일 뿐이므로 즉자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헛되게 욕망할 뿐이다.

라캉이 말하듯이 “욕망은 존재의 결여/열망의 환유이다" 욕망은 언제나 동일한 구조적 결여 또는 균열을 대체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이다. 라캉은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히스테리의 특징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인 반면 강박증의 특징은 불가능한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플라톤,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향연)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에로스에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욕망이 진리와 아름다움을 방해하고 좌절시킨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이성(마부)이 인간의 영혼을, 기개(흰 말)와 욕망(검은 말)을 이끌며 이 두 말을 조종하는 마차로 비유하고 있다. 기개의 상징인 흰 말은 준수하고 훌륭한 외모를 가진 유순하고 좋은 말로서 묘사하고, 검은 말은 험상궂고 더러운 용모를 가진 탐욕스럽고 오만한 못된 말로 그리고 있다. 이성을 상징하는 마부가 기개와 욕망을 상징하는 두 필의 말을 몰아서 진리와 아름다움의 세계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욕망을 상징하는 말이 거칠게 날뛰며 난동을 부려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마부가 이 말을 가시 막대기와 채찍으로 때려 힘겹게 앞으로 나아간다. 

풍요(plenitude)의 남성 신과 빈곤(poverty)의 여성 신 사이에 태어난 것이 에로스이다. 욕망이 충족과 결핍의 두 순간을 부단히 왕래하는 이유는 충족과 결핍이 에로스가 풍요의 신 아버지와 빈곤의 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 성품으로 말미암아 욕망은 충족의 순간 다시 결핍으로 빠지고, 결핍의 순간 다시 충족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근원적 결핍은 '좋음(The Good)'의 결핍이다. 따라서 욕망이 회복하려는 것은 그 근원적 결핍으로서의 좋음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진정한 대상은 '좋음'이다

스피노자, 

인간의 코나투스는 욕망이다. 욕망은 코나투스의 인간적인 표현이다.

인간에게 욕망은 자기 보존의 노력이다 욕망은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스피노자는 자기 보존을 위한 이 맹목적 의지를 '욕구(conatus)'라고 불렀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제3부 정리 7에 따르면 "각 사물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코나투스는 그 사물 자체의 현실적인 본질일 뿐이다" (ET, 108). 인간이 자신의 코나투스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

이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계될 때 그것은 의지(voluntas, will)라 불리고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 충동(appetitus, appetite)이라고 불린다.

욕망은 이렇게 자신의 본질을 보존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힘이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코나투스다"

 더 좋은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부정입니다. 그래서 결핍은 한 사물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의 본성에 속한다고 판단하는 어떤 것이 거부된 것이고, 부정은 한 사물에 대해서 그것의 본성에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 거부된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아담의 욕망은 신의 지성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의 지성에 관해서만 악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아담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안다고 해도 그가 아담이 과거 상태를 결핍했다고, 즉 과거 상태가 그의 본성에 속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코나투스다.

들뢰즈

질 들뢰즈는 욕망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욕구와 욕망을 구분한다. 욕구는 생산과 창조로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라 결핍과 채움과 관계되는 개념이다. 반면, 욕망은 욕구와는 다르게 생산과 창조성으로 연결되고, 현실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욕망은 에너지의 원천이고 역량이다. 다양한 방향과 폭발력을 가진 힘의 원천을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욕망은 모든 사회의 모든 곳에, 자본주의 사회 곳곳에 스며있다. 시장과 공장뿐 아니라 학교와 관공서와 병원에, 심지어 유치원에도 존재한다. 그것이 스며있는 모든 곳에서 욕망은 기성의 틀과 규범을 뒤흔들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 제시하는 욕망은 파괴와 해체의 이미지에 맞서서 '생산하는 욕망이다. 생산하는 욕망은 파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고, 해체에 그치지 않는 이 생산이 욕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생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의 생산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산이다.들뢰즈의 욕망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즉 결여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소비의 사회』에서 거대한 기업들이 옛날의 계급 간의 차이를 대신한 새로운 사회적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면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비가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원동력이며, 나아가 소비주의가 일상의 다양한 문화를 지배한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소비는 대상에 대한 향유가 아니라 차이를 발생시키는 기호의 소비다. 따라서 그것은 소외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소비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간다고 비판한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착취와 예속의 위계 구조를 위협하고 사회의 모든 부분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그래서 이성이 아니라 욕망만이 자본주의적이고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조절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넘어서는 탈주의 선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는 진단하였다.

칸트

생이란 한 존재자가 욕망(욕구 (Begeherung, 영어로는 욕망과 욕구 둘 다 desire로 표기된다)) 능력의 법칙에 따라 행위하도록 하는 그 존재자의 능력이다. 욕망(욕구) 능력이란 그와 같은 존재자가, 그것의 표상들을 통해서 이 표상의 대상들의 현실성의 원인이 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동은 욕망 능력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이 능력은 어떤 대상의 표상을 함축한다 (그것은 물론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수치심’, ‘명예’, “명성’, [타인들의] 인정' 같은 것들은 모두가, 요구되어지는 의미상, 표상의 대상들이다). 주체는 어떤 표상들에 의해 ‘촉발’되며 이 '촉발affection'은 그녀의 행동의 원인인 동시에 그/그녀의 행동이 '정념적으로 규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덕법칙은 자세히 보면 순수상태의 욕망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모든 사랑의 대상을 희생하는, 즉 정념적 대상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희생하고 살해하게 되는 욕망이다.

“그대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라”

 내용이 삭제된 순수 형식인 "그대의 의무를 다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라"는 라캉의 윤리적 명령은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어 반복적이다. 지젝이 말하듯이 이 명령은 “우리 욕망에 대한 어떤 긍정적 보증이나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주체는 그녀 또는 그가 욕망하는 것에 대해 완전히 책임을 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대의 욕망을 훼손하지 말라'는 명령은 공허하고 완전히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실재에 닿는다.전통적 윤리와 달리 칸트의 윤리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상징계의 질서를 넘어서는 불가능한 실재의 윤리다. 정신분석에서 욕망의 실천은 절대적인 명령이며 이 명령의 불이행은 필연적인 죄를 낳는다. 그러므로 "분석적 관점에서 유일한 죄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는 것이다" (SVII, 319). 욕망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죄를 낳을 뿐 아니라 빚도 낳는다. 욕망의 불이행은 주체에게 욕망을 실천해야 할 채무를 안기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칸트철학에서 경향성의 지배를 받고 감성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의 의지는 도덕법칙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성한 의지가 아니다. 따라서 도덕법칙의 완전한 실천을 위해 인간의 무한한 지속, 즉 영혼불멸이 요청된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의 윤리에서도 욕망의 영구적 실천이 요청된다.

영혼의 배고픔, 욕망은 지속은 영혼 불멸을 필요로 한다. 

주판치치가 "순수 실천이성의 환상"이라고 명명한 칸트의 영혼불멸에 대한 요청은 유한한 존재자에게 도덕법칙의 완성에 대한 무한한 진전을 요구하므로 그 자체로 모순이고 역설이다.27) 이런 역설은 만족되지 않는 욕망의 속성을 설명해준다. "지상에서 어떤 것도 도덕적 행동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도덕법칙을 완벽히 이행하려는 욕망의 지속을 의미한다. 칸트가 영혼불멸의 필요성을 가정하는 것은 영혼의 배고픔, 즉 욕망 때문이다.영혼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내세, 즉 불멸을 필요로 한다

푸코, 욕망의 주인이되어야 한다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의 주인'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이다. 그 '소수'는 스스로 자기행동을 바꿀 수 있으므로 주인일 수 있다. 주인은 자기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엔크라테이아(Enkrateia)'를 가진다. '엔크라테이아’는 쾌락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태도이다. 그 태도는 바로 '자기를 제어하는 노력'이다. '엔크라테이아'로 말미암아 '절제(sophrosune)'라는 미덕이 비로소 생긴다. '절제'는 어떤 욕망을 지배하는 상태이다

결국, 개인이 싸우는 대상은, 욕망이 아니라, 바로 자기이다

마르크스는 욕망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는다.

“어떤 집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주위의 집들도 마찬가지로 작다면 그 집은 주거에 대한 모든 사회적 권리 주장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그 작은 집 옆에 궁궐이 하나 솟아오른다면, 그 작은 집은 오두막으로 오그라들 것이다. 그 작은 집은 이제, 그 임자가 권리 주장을 전혀 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거나 아주 작은 권리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문명의 행로 속에서 그 작은 집이 아무리 높이 솟는다 하더라도, 인접한 궁궐이 같은 정도로 또는 더 큰 정도로 높이 솟는다면, 그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거주자는 자신의 네 말뚝 안에서 자신이 더욱더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짓눌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눈에 띄는 임금 증가는 생산적 자본의 급속한 성장을 전제한다. 생산적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부, 사치, 사회적 욕구, 사회적 향유 등의 마찬가지로 급속한 성장을 불러 일으킨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상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도달할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와 비교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과 비교하면 하락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들을 잰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충족 대상을 기준으로 재지 않는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라캉

라캉의 기준에 따르면 영웅만이 욕망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경험하는 것은 항상 한계를 가로지르는 어떤 유익한 일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SVII,309).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요구하며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화해하지 않으며, 두 죽음 사이의 지대는 "그의 욕망의 절대적 지배가 펼쳐지는"장소다(SVII,310). 반대로 일반인은 이 지대의 문턱에서 욕망을 포기하는 죄를 범한다. 한계의 지점에서 일반인에게 죽음은 "베일에 가린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SVII, 309). 그러나 이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에 대한 증오 때문이다.인간을 선에 봉사하게 하는 외적 한계는 '사는 것이 최우선'(primum vivere)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라고 말하지만 두려움의 영향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반인에게는 그가 행사한 죄가 그 둘[사랑과 증오] 사이에 놓여 있고, 이 죄는... 자신을 그렇게 약하고 부적합한 존재로 만든 창조주에 대한 증오를 반영합니다. 이 모든 난센스는 영웅, 그 지대에 들어선 자..... 그가 수용하는 저주 또는 자신의 소망의 실현으로 여겨지는 소멸에 관계할 정도까지 가는 오이디푸스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영웅이 두 죽음 사이의 지대에서 "소망의 실현으로 여겨지는 소멸"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극한을 추구하는 반면 "사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선을 따라 행동하는 일반인은 이 지대에서 욕망을 포기하는 죄를 범하고 욕망을 포기한 나약한 자신에 대한 원망을 창조주에 대한 증오로 투사한다.

욕망의 본질은 구체적인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해주는 그런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언어적인 존재이고 언어는 언제나 인간을 속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찾으며 그것이 욕망의 대상이라고 착각하지만, 어떤 대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여는 끈질기게 인간을 괴롭힌다. 그러기에 욕망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작용하면서 죽음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환유의 의의는 의미화보다는 언어를 지속시키는 연결 자체이기에 라캉은 욕망을 환유로 설명한다. 욕망이란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환유적 속성을 갖는다. 욕망이란 늘 어떤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그것은 사실상 현실 세계에 없는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이 주어지자마자 주체는 즉시 또 다른 대상으로 욕망을 이동시킨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욕망이 겨냥하는 자리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고 언어는 늘 그것을 제대로 지시할 수 없는 본질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계에 출현하는 것은 원초적 상실을 대가로 해서 이루어지기에 욕망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 결여이다. 그런데 사실은 주체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언어적 경험이 되풀이되면서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언어가 주체를 착각하게 만든다. 이 잃어버린 대상을 찾아 욕망의 환유적 운동이 지속되는 것이다.

라캉은 "욕망이란 존재 결여의 환유이다.”라고 정의한다. 존재란 언제나 상징적 질서에서 무無로 남는 것인데 주체는 대타자의 시니피앙에 의존하면서 결여를 메울 수 있는 대상을 찾으려고 한다. 대타자가 욕망하는 미지의 x가 바로 주체가 소망하는 대상으로 주체는 환유적 운동을 통해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다. x가 무엇인지 주체가 끝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유적 운동은 끊임없는 미끄러짐 속에서 역설적으로 주체의 진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진리란 상징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면서 의미화를 거부하는 주체의 진정한 자리인 무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언어가 없으면 욕망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욕망의 진정한 본성은 대상관계에서 특정한 대상을 찾아다니는 욕구와는 다르다. 그것은 외형상으로는 욕구 충족을 위한 요구처럼 표현되지만 사실 언어 속에서 결여로 남는 존재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망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정신분석이 문제 삼는 욕망은 언제나 무의식적 욕망이지 의식적 욕망이 아니다. 후자는 요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이 겨냥하는 대상은 상징계에서 결여로 남는 주체의 존재 자체이다.

『안티고네』에 대한 라캉의 주해와 관련하여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라'라는 공식과 욕망의 형상으로서의 안티고네를 강조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라캉의 주해에 나오는 또다른 매우 유별난 문구 욕망의 실현에도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 안티고네를 안티고네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그녀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녀가 그녀의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욕망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욕망은 그 본성상 욕망의 실현에 대립하니까 말이다. 따라서―이'욕망의 실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욕망의 충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주체가 욕망하는 어떤 것의 실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라캉의 이론에는 욕망된 대상 같은 것은 없다. 요구된 대상은 있다. 그리고 어떤 주어진 대상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만족을 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요구에서 뺄 때 얻게 되는 것을 지칭하는, 그 어떤 실정적 내용도 없는, 욕망의 대상 원인이 있다. 끝이 (아마도)없는 환유를 낳는 이 뺄셈의 논리에 본질적으로 연계되어 있는바, 욕망은 주체의 우주 속에 어떤 통약불가능한/무한한 척도를 도입하는 그 무엇에 다름아니다. 욕망은 바로 이 '무한한 척도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은 무한한 것을, 무한한 척도를 '측량하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필연적으로 최후의 판단[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정식화된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했다"는 것이, 그 욕망을 이를테면 중국에 가서 실현했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 상상해보라'라고 라캉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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