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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Jan 03. 2025

욕망의 윤리

모든 욕망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순수 욕망

 '욕망은 요구의 무조건적 요소를 “절대적” 조건으로 대체한다'고 할 때, 충동은 이 조건을,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과정의 산물로 만들면서, '탈-절대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 욕망의 이 계기는 주체가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 자신의 욕망의 바로 그 원인을, 그것의 절대적 조건을 희생하는 것이 되는 계기로 정의될 수 있다. 그녀가 욕망의 바로 그 지탱물을 그 욕망에 희생하는 계기, 즉 그녀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계기. 욕망의 근본적 배치가 모든 주어진 대상의 불충분함('그건 그것이 아니다)이 판명나도록 하는 무한하고 통약불가능한 척도를 함축한다면, 순수 욕망은 욕망이 그 자체의 원인에 대해 (그것의 절대적 조건을 위해) '그건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도록 강제당하는 계기로서 정의될 수 있다. 이는 순수 욕망의 계기가 역설적이게도 욕망이 바로 그 순수성의 토대를 상실하는 계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순수 욕망'이 하나의 상태 - 예컨대 자신의 욕망이 (모든 대상들의) 일체의 정념적 얼룩들이 제거된 순수성을 획득할 주체의 상태 - 가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순수 욕망은 하나의 계기―비틀림의 계기, 뫼비우스 띠에 비견될 수 있을 굴곡의 계기―이다. 그것의 면들 가운데 하나 위에서 움직이기를 고집한다면, 갑자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면에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순수 욕망은 욕망이, 그것의 환유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치는, 여타 대상들 가운데서 자신의 원인과 조우하는 계기이다. 이와 동시에 순수 욕망은 행위와 일치한다. 이 행위는 주체의 근본적 환상의 틀 속에서 성취된다. 하지만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틀이기에 그것은 환상 '바깥'에서, 또 다른 장 속에서 끝난다. 충동의 장 말이다.

욕망의 윤리

주판치치는 두 가지 무한을 구별하고 그에 근거하여 두 가지 윤리를 구분한다. 하나는 비-성취의 논리와 연계된 ‘악무한’으로 묘사될 수 있는 욕망의 무한이며, 다른 하나는 실재의 논리, 실현의 논리와 연계된 향유의 무한이다. 첫 번째 범형이 ‘고전적 윤리’(안티고네)의 좌표를 낳았다면, 두 번째의 범형은 ‘근대적 윤리’(시뉴 드 쿠퐁텐)의 좌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주판치치는 이 두 번째 윤리를 특권화하는 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살기 위해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모든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로 삼아라”는 “주인 담론에 토대를 둔 윤리이기를 거부함과 동시에 윤리적인 것의 궁극적 지형을 ‘자기 자신의 생’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근거하고 있는 (후)근대적 윤리라는 불만족스러운 대안을 똑 같이 거부하는 어떤 윤리를 위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여기서 주판치치가 제시하려는 <실재의 윤리>가 (후)근대적 윤리와 다른 점은 전자는 죽음 충동과 마주하는 윤리인 데에 반해, 후자는 죽음 충동을 외면하고 자신의 ‘생’에 몰두한다는 점에 있다. 주판치치는 후자의 윤리가 생을 추구하면서도 이상하게 죽음으로 귀결되는 역설적 방식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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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윤리는 환상의 윤리(혹은 주인의 윤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죽을(혹은 죽일) 준비가 된 누군가에게 일체의 윤리적 존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종종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점점 더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윤리를 실천하는 자들은 오늘날 테러리스트, 광신도, 원리주의자, 미친 놈 등으로 불린다. 우리는 (후)근대적인 인간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 죽거나 죽인다는 것을 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환상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실현하지 않으려고 매우 유의하고 있다. 우리는 욕망을 실현하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선호한다…….우리는 이 실현을 피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향유로부터 대피하고, 우리의 안녕을 역행하게 하는 충동으로부터 대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향해 스스로를 재촉한다. 죽음은 죽음 충동에 대항한 최선의 피난처임이 판명된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죽음을 향해 스스로를 재촉”하는 이 괴기한 윤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계속해서 고문을 당하는 자가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빨리 죽여 달라고 외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라깡의 공식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죽음을 향한 요구일 뿐이지, 죽음 충동 자체는 아니다. 죽음 충동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며, 삶이라는 활을 가지고 수행하는 작업이다. 활을 가지고 행하는 작업은 활을 당기고 다시 활을 당기는 일을 반복할 수 있지만, 당기는 작업을 멈출 수도 있다. 이 작업의 과정은 단순하지가 않다. 주판치지는 활이나 화살에 주목하는 대신, 당기고 멈추는 작업 자체에 주목하며, 이 작업의 윤리를 ‘실재의 윤리’라고 명명한다.

욕망의 추진력

인간 존재는 결코 실현되지 않지만 항존(恒存)하는 갈망, 즉 불가능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절대적 행복인데, 그 행복은 서로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중에는 근친 상간 때 경험한 가설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적 쾌락이 있다. 욕망(desir)이라고 하는 그러한 갈망, 즉 육체의 성감대에서 태어나는 그 격동은 심리적 긴장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낳는다. 그 긴장은 욕망의 격동이 억압의 둑에 의하여 저지 당하면 더욱 더 격화된다. 억압이 강경하면 할수록, 긴장은 더욱 증가한다. 억압의 벽 앞에서 욕망의 추진력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길을 동시에 빌리게 된다. 에너지가 해방되고 분산되는 방출(放出, décharge)의 길과, 에너지가 여력(餘力, energie résiduelle)으로 보존되고 축적되는 정체(停滯)의 길이다.

욕망의 실현

욕망은 주체의 우주 속에 어떤 통약불가능한/무한한 척도를 도입하는 그 무엇에 다름아니다. 욕망은 바로 이 '무한한 척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은 무한한 것을, 무한한 척도를 '측량하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필연적으로 최후의 판단[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정식화된다.

칸트는 최고선의 실현을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된 의지의 필수적 대상으로서 정립한다. 바로 이것은 정확히 라캉이 욕망의 실현이라 부르는 것에 상응한 것으로 가정될 수 있을 무한한 척도의 실현을 함축한다. 라캉에게도 그렇지만 칸트에게도 걸려 있는 문제는 어떤 선―이 경우는 최고선 - 의 실현이 아니다. 걸려 있는 것은 어떤 대상의 실현이 아니다. 최고선은, 이러이러한 (실정적)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의지와 도덕법칙의 완벽한 부합으로서 정의된다. 최고선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칸트는 우선 죽음 너머의 영역을 열어놓을 영혼불멸성의 요청을 도입하며, 그리하여 주체가 두 번째 죽음에 대한, 종말에 대한 관계를 확립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말의] 관점으로부터―그리고 오로지 이러한 관점으로부터만 – 최고선의 실현이라는 문제는 정식화될 수 있다.

욕망의 형상에서 작동하는 무한은 ‘부정적 크기’의 무한이다.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추구(영원한 '그건 그것이 아니야') 속에서 구성되는 무한이다. 이미 우리 행로의 상당 부분을 답파했음에도 우리 앞에 남은 행로는 여전히 무한하다. (필연적인 혹은 '구조적인’) 종결 같은 것은 없다. ‘욕망의 실현’(무한의 실현)이라는 관념이 어떤 성급한 반응을 자극하고 이 '악무한'을 끝내려는 촉박함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성공할 경우 (욕망의) 무한을 드러내는 행위를 내포한다

욕망의 실현이 가능하려면 죽음 속에 시간적 차원 또한 도입되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죽음을 살게 되며, 그 시간동안 삶(욕망의 삶)이 측량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의 계기繼起 말이다. 최후의 한탄을 위한 시간이 있어야만 하며, 그것이 발언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틀 또한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환상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실현하지 않으려고 매우 유의하고 있다. 우리는 욕망을 실현하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선호한다. 이러한 태도는 여기서 그 실제 얼굴을 보여주는 영원한 환유에 대한 선호를 함축한다:그것은 우리를 초월하는 어떤 이상에 대한 무한한 뒤쫓음인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우리를 뒤쫓는 무한으로부터의 도피임이 판명난다. 욕망의 실현이라는 문제가 떠올라 이 평화로운 도피 과정을 침범할 때 조급함이 생긴다. 그렇지만 그것은 안티고네의 조급함과는 같지 않은 조급함이다. 우리는 이 실현을 피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향유로부터 대피하고 우리의 안녕에 역행하는 것을 하게 하는 충동으로부터 대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향해 스스로를 재촉한다. 죽음은 죽음 충동에 대항한 최선의 피난처임이 판명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또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강조해야 한다. 즉 칸트에게 강조점은 실현에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두어진다. 의지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실현을 방해한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최고선의 실현은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된 의지의 필연적 대상이다.’‘최고선’을 최고선에 대한 정의로 대체할 경우 다음과 같이 된다: 의지가 도덕법칙과 완전하게 합치됨의 실현은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된 의지의 필연적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 걸려 있는 것은, 도덕법칙에 부합할 의지를 의욕함이다. 의지가 의지 자체와 그것의 대상으로 이처럼 분열되므로(의지는 동시에 의지의 대상이다) 최고선의 실현은 불가능해진다.

요약해보자. '향유를 의욕함'은 욕망의 편에서 우리를 유지해주는 반면에 '욕망을 실현함'은 향유 편으로 우리를 옮겨놓는다.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와 클로델의 삼부작 ‘볼모’에서 ‘시뉴 드 쿠퐁텐’의 욕망의 실현 방식

안티고네는 부정적 형식으로 무한을 실현한다. 그녀는 그것을 부재하는 것으로서 실현한다. 무한은 안티고네가 그 무한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것' 속에서 불러내어진다. 욕망의 실현은 세 단계로 성취된다.

•생에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것이 있다('절대적 조건').

•이 사물을 위해 모든 것을 (심지어 생마저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단 한번의 제스처로 희생함으로써 절대적 조건을 실현한다.

시뉴 드 쿠퐁텐의 경우에 우리가 발견하는 그 '심연적 실현'은 결코 이와 동일한 질서에 있지 않다. 이것 또한 세 단계를 통해 성취되지만, 이 세 단계의 내용은 아주 다르다.

* 생에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것이 있다('절대적 조건).

•이 사물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다)

•절대적 조건을 실현할 유일한 방법은 예외로서의 그것을 희생하는 (그것의 예외라는 성격을 희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라'는 '(~)에 대해 양보하다'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것과 단순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가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에서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안티고네의 경우 이는 그녀가 어떤 최후의 '소유'를 보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준다(주버린다)는 것을 함축한다. 종국에 그녀는 이 최후의 '소유'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그녀는 그것과 융합되며, 그녀 자신이 그녀를 관통하는 욕망의 기표가 되며, 이 욕망을 체현한다. 시뉴의 경우 이는 한층 더 나아간다. 그녀 또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그녀에게 이 최후의 '소유', 그녀의 존재의 기표에서도 양보해야 하며 '비소유'에서 스스로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시뉴 드 쿠퐁텐의 경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기'란 정확히 그녀가 모든 것을 '줘버린다'는 것을 함축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곧 욕망의 실현이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는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꿈이란 잠을 연장하려는 욕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 꿈이란 본질적으로 어긋난(상실된] 현실, 즉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속에서 무한히 반복됨으로써만 이뤄질 수 있는 현실에 바치는 오마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대상의 상실을 더없이 잔인한 부분까지 그려냄으로써 욕망을 현전화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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