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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Dec 27. 2024

욕망과 죄


욕망 충족의 지연

 - 매주 복권을 사는 이유

『꿈의 해석』에 나오는 또 다른 프로이트의 사례연구인 '푸주한의 재치 있는 아내'에 대한 라캉의 논의는 (전)의식적 욕망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의 구분에 근거하여 유사한 방식으로 팔루스 가지기와 팔루스 되기의 변증법을 소개한다. 아래는 그녀가 프로이트에게 이야기한 꿈이다.

“나는 만찬회를 열고 싶었어요. 하지만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약간의 훈제 연어가 전부였어요. 나가서 뭐든 좀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곧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 일요일 오후라는 것이 기억났어요 다음으로는 출장연회업체에 전화를 하려 했지만 전화가 고장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만찬회를 여는 것에 대한 소원을 포기해야만 했어요”.

꿈의 배경 중 하나는 자신에게 푹 빠져 있으며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모든 면에서 매우 만족하고 있는 듯 보이는 남편이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닌 아내의 여자 친구를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아내가 눈치 챈 것이다 (친구는 매우 마른 편이었으며 그는 보통 자신의 아내와 같이 통통한 여자만을 좋아한다). 환자는 어떻게 그가 다른 무엇을 더 욕망할 수 있는가, 어떻게 아내에 대해 전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그의 취향도 아닌 여자를, 그를 만족시키기에 부적합해 보이는 여자를 욕망할 수 있을까? 라캉은 그녀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남편] 역시 모든 것이 충족되었을 때조차 여전히 부족한 상태로 남아있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E 626).

꿈꾸기 전날 환자의 친구는 환자에게 살이 좀 찌고 싶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언제 우리에게 식사초대를 할 거야? 넌 항상 우리에게 정말 좋은 음식들을 만들어 주었어.” 그렇다면 꿈의 소원 중 하나는 그녀의 집에서 식사하고자 하는 친구의 소원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이 말하듯이, 사실 친구가 살이 쪄서 남편이 그녀와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친구에게는 멋진 일일 것이다!"만찬회를 열고자 하는 발현몽manifest dream의 소원(나는 만찬회를 열고 싶었다) 푸주한의 감상하는 듯한 응시를 받으며 살이 몇 파운드쯤더 찔 수 있게 해달라는 친구의 요청을 좌절시키고자 하는 잠재적latent 소원에 의해 취소된다. 이것이 그녀의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첫 번째 해석이며, 이는 프로이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의식적 소원과 무의식적 소원들 사이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의 두 번째 해석과 이에 대한 라캉의 주석은 더욱 상세히 전개되며 꿈에 나타난 환자의 소원들 중 하나의 무의식적 의미를 관찰한다 그것은 이야기나 플롯 자체에 나타난 의미가 아니라 꿈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기표들 중 하나인 '훈제 연어'의 의미이다. 만약 우리가 꿈을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훈제연어를 상황적 세부 또는 구실로 보기 쉽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우리는 모든 꿈의 요소들을 관찰해야만 하며 라캉의 말대로 “욕망은 문자 그대로 à la lettre] 이해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욕망이 표현되어 있는 꿈의 문자들을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해석은 다소 우회적이다. 프로이트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이 여자가 캐비아를 좋아하며 매일 아침 캐비아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캐비아를 사오지 말라고 부탁하여 남편을 '애타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서 그것을 박탈함으로써 그녀는 단순히 그것을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주고자 하는 열망want-to-give'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가 활기를 유지할 수 있게 또는 초조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캐비아에 대한 소원을 충족시키지 않고자 하는 소원-그것은 무의식적 소원이 아니다 - 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프로이트가 해석하듯이 그녀는 "만족되지 않는 소원"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 라캉은 이것을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가지고자 하는 [전의식적] 욕망"이라고 표현한다(E 621). 그러므로 남편에 대한 그녀의 명백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원할 수 있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는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마른 여자 친구에 대한 관심을 감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 친구가 가진 것 중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그녀는 남편의 시각으로 친구를 보려고 노력하며, 무엇 때문에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가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알아낸 한 가지는 친구가 훈제 연어를 좋아하는데도 억지로 그것을 멀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흥미로운 상황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그녀가 이 질문에 대해 의식적으로 궁금해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데, 아마도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무엇인가를 박탈하는 이유를 자기 자신의 동기와 관련하여 추측했을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캐비아를 금지당하고자 하는 환자의 소원이 연어를 자제하고자 하는 친구의 소원을 모방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프로이트는 환자가 친구에게서 그러한 욕망에 대한 이유를 감지 또는 상상했으며, 그녀 자신도 그러한 욕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 욕망을 자신의 것이 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하는 행위 desiring 그 자체에서 도출되는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써 욕망이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만듦으로써 단순히 욕망을 지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푸주한의 아내는 자신의 친구와 동일시한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히스테리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다른 사례도 제시될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스완은 오데트를 필사적으로 사랑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처음에 그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좀더 신중히 분석했을 때 그는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대신 그는 고통은 멎으면서도 여전히 그 자신은 사랑에 빠져 있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의 욕망망은 이 후자의 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데트에 대한 사랑을 끝낸다면,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치유’된다면 고통이 멎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사랑랑이라는 점이다. 주체는 자신의 정념성, 자신의 존재와 현 실존의 중핵을 구성하는 파토스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내가 매주 복권을 사는 이유이다. 당첨되기 보다는 당첨을 욕망하면서 이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당첨이 되지 않고 무한 연기되기를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게 주지 마세요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욕망과 죄

아가멤논은 전쟁을 위해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그의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시킨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가족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비극적인 복수의 서사가 시작된다. 이피게니아의 희생은 아가멤논에게 큰 죄책감을 안기며, 그의 운명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딸을 제물로 바칠 때에 하필이면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겠다는 구실로 불러오는 바람에,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물론이고 아가멤논의 거짓말에 이용당한 아킬레우스도 분노했다.아들 오레스테스도 충격을 받았는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이피게네이아와 이 일에 대해 대화하면서 "나도 아버지의 비행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라고 아가멤논을 비판한다.

이로 인해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미움을 사 결국 귀국 후 자신의 아내와 아내의 내연남이 일으킨 쿠데타에 살해당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아가멤논과 클뤼타임네스트라 모두는 단지 신들의 의지를 이행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나도) '자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만한 개인적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제받을 수 없는 방식으로 죄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하는 죄의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하는 라캉적 경구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이 주체의 욕망이 되는 순간 – 다시 말해서, 주체가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이용해 먹고 거기서 자신의 잉여-향유를 발견하는 순간―유죄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 필연성, 즉 ‘운명’을 지탱하는 것은 다름아닌 (주체의) 욕망인 것임이 드러난다.

무의식적 욕망의 목소리는 낮지만 절대로 파괴될 수 없는 집요함을 갖고 있다.

요구는 시니피앙들 속에서 분절됨으로써 환유적 잔여물을 남겨놓고 이를 자기 밑으로 흐르게 한다. 이 환유적 잔여물은 미결정된 요소가 아니라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포착 불가능한 조건이 되는 요소인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밖에 없고, 충족되지 못하며, 실현 불가능하고, 몰인식되는 요소이다. 이 요소가 바로 욕망이라 불리는 것이다. 욕망의 기능은 주체에게 시니피앙이 낳은 효과의 최종적인 잔여물이다. Desidero" (나는 욕망한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코기토' 인 것이다

욕망의 선

라캉이 그리는 선, 안으로 접힌 8'이라 칭했던 선,  이것이 우리가 [잘라]만들 수 있는 어떤 표면이라는 사실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여기서 저 유명한 오일러의 원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 표면의 가두리는 연속체를 이루는데, 물론 그러다가 어느 한 점에 이르게 되면 그보다 앞서 펼쳐져 있던 표면에 의해 [덮여] 감춰지게 된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이 그림은 서로 겹쳐진 두 개의 장을 그린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무의식이 전개되는 장으로서 정의된 이들 면이 성적 현실이라는 또다른 면에 겹쳐져 그것을 덮어 감춰버리는 지점, 저는 바로 그곳에 리비도를 위치시켰다. 그렇다면 리비도는 이 양자에 속한 것, 논리학에서 말하는 교집합의 지점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표면을 완전히 옆면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장이 겹쳐져 있는 듯이 보이는 그 부분은 빈 공간vide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표면은 또다른 표면, 즉 크로스캡cross-cap, 일명 주교관이라 불리는 것과 상통하는 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표면을 하나 더 보완해서 두 개의 가두리가 서로 맞물리게 한 다음 봉해 보면 구는 마치 하나의 원이 안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양 그것을 봉해버리게 된다. 구가 원에 대해 이렇게 보완의 역할을 하듯이 이 표면은 안으로 접힌 8에 대해 똑같이 보완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자, 바로 이렇게 해서 이 표면은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겉과 안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두번째 특징은 이 형태가 곡선을 봉해버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딘가에서, 제가 방금 두번째 모델 위에 그린 선을 따라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전의 표면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을 통해 우리는 요구라는 장 - 여기서 무의식의 소실이 현전화된다 - 과 성적 현실이 바로 욕망이라는 장소에서 접합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욕망의 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 이 선은 요구와 연결되어 있고, 이 선에 의해성적 효과가 경험 속에서 현전화되는 것이다

욕망의 도난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태어날 때 신탁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즉 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한다는 끔찍한 신탁의 말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양부모 손에서 크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그 신탁의 말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야기에서 오이디푸스  '주체는 욕망을 박탈당하고 그 대가로 시장으로 보내어지며, 거기서 최고 입찰자에게 주어진다.그렇다면 왜 오이디푸스는 유죄가 아닌가? 왜냐하면 바로 그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욕망을 – 그 욕망 만이 그를 유죄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 교환으로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사회 질서'(왕위)에로, 그리고 이오카스테에게로 넘겨진다. 그는 나중에 이를 그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받은 재앙스러운 선물이라고 부른다. 근친상간과 관련해서 오이디푸스와 코로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다시 상기해보자.

코로스: 그러나 그대는 행했소.…………… 

오이디푸스: 아니오.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소.

코로스: 어째서요? 

오이디푸스: 나는 선물을 받았을 뿐이오. 불쌍한 나는 봉사해준 대가로 도시로부터 그런 선물을 받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마도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욕망의 도난―그리고 그 대가로, 어머니.

식욕부진

 식욕부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 있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나를 충족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충족시키고 싶지 않은 것은,나의 욕망이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식욕부진은 모든 만족에 반하는 외침이며, 불만족이라는 일반적인 상태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이다.

욕망과 도덕법칙

칸트가 실천이성에 대해 쓴 것과 같은 양심 이론은 도덕법칙에 대한 어떤 규정을 통해서만 지탱되는데, 그 규정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도덕법칙은 순수 상태의 욕망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순수 상태의 욕망이란 사랑의 대상을 그것에 담긴 인간적인 애정과 더불어 완전히 희생시켜버리는 것으로 귀착되는 욕망이다. 이는 정념의 대상에 대한 폐기일 뿐 아니라 그 대상의 희생이자 살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의 대상

욕망의 대상은 실제로는 욕망의 '버팀목'이라 할 하나의 환상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미혹이다. 

"인간의 욕망은 큰 타자 the Other의 욕망이다"라는 이 공식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헤겔과 관련하여 이 공식은 인간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향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인간은 늘 타자에 의해 욕망된 것을 욕망한다거나 혹은 다른 인간이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인간은 없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욕망에는 타자의 욕망이 새겨져 있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또한 인간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인정 욕망desire for recognition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욕망의 대상은 바로 타자로부터의 인정인 것이다. 

1957년의 논문 「무의식 속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에서 라캉은 은유와 환유를 기표의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고 욕망을 환유 측에 설정한다. 욕망은 환유적 과정으로, 더 엄밀히 말해 존재 결여의 환유로 정의된다. 두 기표의 관계는 이 존재의 결여를 정립하는데, 이는 다시금 인간 존재의 욕망을 항상 무언가를 향한 욕망으로 (환유적 차원에서) 정립한다. 이러한 움직임의 당연한 결과로 분열된 주체($)가 생겨난다

코제브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석하면서 발화Logos라는 결정적인 요소를 덧붙인다. 발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를 드러내고 욕망을 위한 욕망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발화 없이 생명체는 결코 자의식을 획득할 수 없다. 인간에게 발화는 의식과 자기감정을 초월하여 자의식을 발달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코제브는 이렇게 썼다. "욕망은 항상 나의 욕망으로 드러나며,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동물은 오직 자기감정selbst-gefühl을 얻을 수 있을 뿐, 자의식 selbst-bewußtsein은 획득할 수 없다. 동물은 그 자신에 대해 말할 수가, '나는…………'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발화는 또한 인간이 스스로를 '자기'로 드러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처럼 발화를 통해 드러난 존재는 항상 이중적이다. 즉 그것은 드러내는 존재와 드러난 존재를 동시에 포함한다. 바꿔 말하자면, 발화로 제시된 그/그녀는 주체이자 객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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