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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Dec 06. 2024

욕망의 기호

라캉에게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실현 불가능한 꿈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본질적인 뜻은 '원인과 결과'다. 그걸 줄여서 '인과(因果)'라고 부른다.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오히려 윤회의 협소한 의미다. 세상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로 돌아간다. 씨앗을 심으면, 그에 따른 열매가 열리는 법이다. 그걸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부른다. 윤회의 원인은 욕망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괴로움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욕망을 갖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이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그럼 욕망을 채우면 되지 않나.

“설령 욕망을 충족해도 더 큰 욕망을 부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욕망을 갖는 일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정된 것이 없으니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 

그럼 남는 것도 없지 않나. 삶이 너무 허무하지 않나.

"그건 소유하는 방식에 익숙한 삶을 사는 사람의 생각이다. 오히려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음을 알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

물 物 das Ding: Thing 의미의 영역을 넘어 실재계에 속하는 것으로, 욕망이 겨냥하는 잃어버린 대상을 말한다. 쾌락 원리는 주체로 하여금 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물의 주위를 맴돌게 만드는 일종의 보호 작용이다. 하지만 물은 끊임없이 주체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므로 주체는 계속해서 그것에 도달하고자 한다. 나중에 물은 '오브제 a'로 연결된다. 물은 한마디로 포착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무의식은 부성 은유에서 비롯되는 원초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한다. 일단 부성 은유가 성공하면 최초 욕망은 환상의 형태로 상징계에 나타난다. 부성 은유에서 억압되면서 사라진 최초 기표, 즉 '어머니의 욕망'은 주체가 되찾고 싶은 상실된 기표가 되면서 시니피앙 연쇄에 의해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 영원한 구멍으로 남는다. 의미화 연쇄가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왜 부성 은유가 욕망하는 주체를 낳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시니피앙의 대체로 주체는 존재성을 얻었지만 그것은 영원한 상실을 대가로 하기 때문이다. 상실은 사실 언어적 속성에서 비롯되는데 주체는 그것을 대상을 통해 채우려 하기에 욕망은 영원히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하는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일 수밖에 없는데 초월적 공간인 대타자의 장에서 대타자의 담론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대타자의 담론은 주체가 상상했던 최초 욕망이 사라진 빈자리를 은폐하면서 작용하기에 본질적으로 주체에게 무지의 틈을 남길 수밖에 없다.

욕망이란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환유적 속성을 갖는다. 욕망이란 늘 어떤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그것은 사실상 현실 세계에 없는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이 주어지자마자 주체는 즉시 또 다른 대상으로 욕망을 이동시킨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욕망이 겨냥하는 자리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고 언어는 늘 그것을 제대로 지시할 수 없는 본질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계에 출현하는 것은 원초적 상실을 대가로 해서 이루어지기에 욕망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 결여이다. 그런데 사실은 주체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언어적 경험이 되풀이되면서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언어가 주체를 착각하게 만든다. 이 잃어버린 대상을 찾아 욕망의 환유적 운동이 지속되는 것이다.

라캉은 "욕망이란 존재 결여의 환유이다."라고 정의한다. 존재란 언제나 상징적 질서에서 무無로 남는 것인데 주체는 대타자의 시니피앙에 의존하면서 결여를 메울 수 있는 대상을 찾으려고 한다. 대타자가 욕망하는 미지의 x가 바로 주체가 소망하는 대상으로 주체는 환유적 운동을 통해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다. x가 무엇인지 주체가 끝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유적 운동은 끊임없는 미끄러짐 속에서 역설적으로 주체의 진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진리란 상징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면서 의미화를 거부하는 주체의 진정한 자리인 무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상징계의 만남이 상상계의 축에 의해 교란된다는 것은 진정한 욕망을 드러내는 꽉 찬 발화가 얼마나 힘든가를 말해준다.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찾지만 혼란 속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상상계는 동일시와 소외, 그리고 허구적인 것을 매개로 욕망의 진실을 가린다. 그렇기에 라캉은 의식적 담론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말실수, 거짓말, 실착 행위 등에서 진리가 더 많이 발견된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실수에는 자아의 지배력이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해 라캉은 반쯤 말하기를 수단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욕망은 궁극적으로 물 (상실한 대상) 과 죽음을 향한다. 안티고네의 비극이 보여주듯이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신분석적 윤리의 기준은 "그대는 그대 안의 욕망에 따라 행동했는가?"라는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지닌다.

욕망은 기표의 연쇄를 넘어선 물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욕망이 위치하는 경로는 단순히 의미사슬이 조절하는 경로가 아니라 의미사슬 밑에 흐르는 것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아닌 것이면서 우리인 것, 우리의 존재와 비존재다"

욕망 한가운데 물이 존재한다. 물은 마치 욕망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욕망의 구심점을 형성한다. “물의 문제는 우리 욕망의 중심에 열려 있고 동시에 결여되어 있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 여전히 밀착되어 있다" (SVII, 84). 법과 욕망의 변증법에 의해 주체는 법을 위반하고 물/주이상스에 접근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위반의 욕망은 곧 물에 대한 욕망이다.

「로마서 7장 7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러면 율법이 곧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죄는 이 계명을 기화로 내 속에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살았었는데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져다주어야 할 그 계명이 나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기화로 나를 속이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타자의 주이상스에 대한 주체의 욕망은 시기심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심은 인간욕망의 신비다.

·그 인간욕망의 가장자리에서 출현하는 타자의 주이상스에 대한 시기심은 인종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쉽게 목격된다. 타자를 타자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바로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밀레가 말하듯이 "인종차별주의는 대타자의 주이상스를 상상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것은 대타자가 주이상스를 경험하는 독자적이고 특수한 방식에 대한 증오다. 

인간욕망의 가장자리에서 출현하는 타자의 주이상스에 대한 시기심은 인종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쉽게 목격된다. 타자를 타자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바로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밀레가 말하듯이 "인종차별주의는 대타자의 주이상스를 상상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것은 대타자가주이상스를 경험하는 독자적이고 특수한 방식에 대한 증오다. 그[타자]는 가질 자격이 없는 주이상스를 항상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진짜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은 대타자의 주이상스에 대해서다.""25) 또는 지적이 말하듯 인종차별주의는 "타자가 우리에게서 그것을 훔쳐서 그 대상-보물을 소유하거나 (그래서 우리에게 그것이 없는 것이다) 또는 우리가 그 대상을 소유하는 데 위협을 가한다"는 인식에 기초한다.26) 타자가 나의 주이상스를 빼앗았다는 인식은 내가 거세된 원인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주이상스를 향유하는 인종적 타자는 나를 거세시킨 장본인이므로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대타자에게 향락을 훔쳤다는 죄를 지움으로써 우리는 훔쳐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결코 소유한 적이 없다는 외상적 사실을 은폐한다."27) 주이상스의 결여는 상징적 거세를 당한 주체의 원초적 상실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대상이 없다

욕망은 결핍이다

욕망은 대상 a이다

욕망의 기호

세미나 VIII에서 라캉은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 “욕망의 기호"즉 발기된 음경은 "욕망의 대상, 욕망을 발동시키는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남성 동성애자가 추구하는 것은 (욕망의) 기표가 아니라 (욕망의) 기호이다. 그러므로 그의 욕망의 원인은 부재(상대의 욕망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결여)라기보다는 현존(상대의 욕망을 나타내는 기호로서의 발기된 음경의 현존)일 것이다.

라캉은 이 개념을 『향연 Symposium』의 논의와 더불어 설명한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알키비아데스Alabiades는 푸주한의 부인과는 달리 타자의 욕망의 기표에는 - 알키비아데스의 타자란 소크라테스이다 -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대신 그는 소크라테스가 그를 욕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기호를 요구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발기하기를 원한다, 그 자체가 그에게는 타자의 욕망을 나타내는 기호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문자 파이(Φ, 팔루스)를 소문자 파이(-φ, 상상계적 거세)로 좌천시킨다는 라캉의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환원된다기보다는(세미나 VIII, 296) 더욱 정확히 말하면 기표에서 기호로 축소된다는 뜻인 듯하다. "타자의 욕망은 기표의 표식에 의해 우리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욕망의 기호를 원한다. 타자의 욕망즉 타자가 원하는 것,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가 우리로부터 원하는 것은 숨겨져 있거나 또는 기표에 의해, 무형의 기표인 팔루스에 의해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것은 x, y, z를 하라는 요구와 같이 즉각적으로 명백한 것이 아니다. 모든 말은 요구이므로, 욕망은 결코 직접적으로 말해질 수 없으며 라캉이 제시하는 대로 모든 말은 (응답, 인식 또는 승인을 위한 일종의 요구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욕망이란 무의식적 욕망이므로, 욕망은 해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 너머에 있다. 라캉의 이론에서 타자의 욕망을 나타내는 기호로써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타자의 욕망의 모호함과 타자의 욕망에 대한 해석의 불확실함에 의해 야기되는 불안을 해소하는 한 방법이다.

좋은 분석가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그가 찾는 기호를 건네주지 않는다. 라캉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자신의 욕망 안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이 경우 욕망은 기호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 부재의 기표에 관련된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욕망을 "변증법화dialectize"시키고자 한다. 현대 정신분석 역시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야 한다. 라캉에 의하면 분석가는 분석수행자에게 어떤 것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시되어야 하는 기호는 기표의 결여[를 나타내는 기호]이기 때문이다"(세미나 VIII, 275). 이는 명백히 S(/A), 타자 안에 있는 결여를 나타내는 기표(의미화 연쇄 자체에 내재된 결여를 나타내는 기표)와 관련된다. 분석이 제대로 종결되기 위해서 분석수행자는 반드시 타자 안에 있는 결여를 대면해야 한다.

대문자 파이는 “기표로부터 배제된 기표”, 즉 의미화 체계 자체에서 배제된 기표이므로 “그것은 오직 책략, 밀수密愉contraband 그리고 좌천 degradation을 통해서만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상상계적인 파이의 역할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대문자 파이는 자체는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로 부재 자체에 의해 환기될 수 있는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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