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미친 듯 산에 다니던 10여년전이 생각난다.
100명산을 완주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당시에는 도저히 쉽게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틈만 나면 100명산 가는 산악회에 몸을 실었다. 100명산 목록을 만들어 놓고 갔다 와서는 하나씩 지우는 재미로 살았다. 그런데 습관처럼 매주 휴일 다니다 보니, 또 다른 재미가 부수적으로 따라 오게 되었다. 바로 하산주였다. 사실 즐겼던 것은 산에서 내려와서 먹는 밥(오후 3시나 4시경에 먹는 점심 겸 저녁) 에 소주 한 병 곁들이는 재미였다 --- 시간 상으로 오후 3시나 4시 쯤은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다른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 중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다. 예를 들면 등산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것이다 --- 소주 한 병을 큰 컵에 두 잔 정도 연거퍼 들이키고 나면 찾아오는 머리 속의 아리까리함, 가슴속에 저며오는 아련함, 해냈다는 뿌듯함 등이 상승작용이 일으켜서 그보다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힘은 더 이상 없으리라. (환상, 좋은 말이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환상이란 분열된 주체가 대상과 맺는 관계 아니면 균열이다. 한마디로 정신이 무언가로 해멘다는 뜻이다, 얼마나 좋은가. 오늘날 이 정신없는 세상에 딱 들어맞지 않는가). 2홉들이 딱 한 병이었다. 그 힘으로 산악회 버스를 타고 서울(주로 양재역 이나 사당역 때로는 신사동) 또는 인천(동막역)으로 돌아 왔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면 한 잔 했던 환상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맨 정신으로 원상복귀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막걸리 한 잔을 털어 넣어야 했다. 덕분에 일 주일이 금방 흘러갔다. 직장에 나가면서도 그 재미로 휴일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도 많고 산악회 호출도 넘쳐 나는데 나는 나가기 싫다.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재미가 달라 진 것이 아닌가, 흥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늙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늙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