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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이야기

나를 나답게 사는 법


대박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대단한 시청률을 보인 드라마가 종영을 하고, 주연 배우를 통해서 간간히 그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딱 맞춤인 그 역할이 사실은 자기에게 온 역할이 아니었고, 다른 배우에게 제안이 갔지만 해당 배우가 제안을 고사하는 바람에 자기가 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작품에 출연한 배우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또 다른 경우는 특정 감독의 작품을 너무 좋아해서 유명 배우가 어떤 역할이라도 좋으니 그 시리즈 영화가 나올 때 꼭 출연하게 해달라고 해서 감독이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그 역할의 비중을 살짝 가미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사무엘 잭슨이 그 예다.)

다른 경우지만 특별히 무슨 연예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사람이 나와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 드라마의 주연이 원래는 나한테 온 제안이었다.’라는 다소 위험한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라고 지칭은 안 하겠다.)

위의 모든 경우가 무엇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렇다. 바로 캐스팅에 관련된 일화이다.

우리가 흔히 캐스팅하면 배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이 캐스팅에 배우의 운명이 엇갈릴 수도 있다.



발레에서도 캐스팅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녹화가 아닌 일회성 무대에 올리는 작품인 발레 공연에서 어떤 역할로 관객에게 춤을 선보일지는 무용수로서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다. 일반적인 발레 컴퍼니에서는 내년이 시작되기 전 연말 정도에 다음 해의 시즌 작품을 발표한다. 이걸 보통 ‘라인업’이라고 한다. 발레단의 규모에 따라서 몇 가지에서 십 수 가지에 이르는 작품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이 라인업만 봐도 그 발레단이 추구하고자 하는 색깔이나 방향성을 대강 눈치챌 수 있다. 클래식 위주의 작품을 하느냐 모던이나 창작 위주의 작품을 올리느냐 아니면 아예 절묘하게 섞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선택할 여지를 남겨놓느냐… 이 모든 것은 발레단의 기획력과 관련이 있다.



작품이 발표되고 연습이 시작되면 무용수들은 캐스팅 발표까지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준비하게 된다. 이것은 관객 입장도 마찬가지다. 특정 무용수를 좋아하는 팬들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그 무용수가 주역으로 출연하는 날의 공연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무용수 못지않게 팬들도 캐스팅 발표를 손꼽아 기다린다. 캐스팅 발표가 나면 예상했던 대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간간히 아주 파격적인 캐스팅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파격적인 캐스팅은 가끔 급진적인 승급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체코국립발레단 세레나데(Serenade) 공연의 한 장면 / 사진 : 김윤식 (copyright.2017 김윤식)



발레를 보는 팬 입장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분명 당일의 주인공을 누가 하느냐는 참 중요하다. 솔로 바리에이션도 중요하고, 주역의 파드되(pas de deux_2인무)도 참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스쳐 지나가는 역할이 있기에 작품이 더욱 완성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예로 발레 갈라 공연을 보면 참 재미있다. 특히 작품의 유명한 그랑 파드되를 보면 아주 시원시원한 기량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만 봤을 때 전막 발레에 비한 감동이 오래가는가? 갈라 공연이나 콩쿠르는 ‘이런 게 발레 테크닉이자 춤이다…’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전막 발레가 주는 스토리의 감동은 느낄 수가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 비유한다면 하이라이트 클립만 모아서 본 기분이 든다. 무대 배경도 없고, 군무도 없고, 무용수들의 주옥같이 흘러나오는 마임 연기도 볼 수 없다. 그래서 갈라 공연에 비해 전막 발레 공연을 보다 보면 주역 캐스팅뿐만 아니라 조연급에 속하는 모든 배역들이 어떻게 연기를 소화할지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가 있다. ‘가면’을 뜻하는 희랍어로 개인이 사회에 대한 이해와 요구에 따른 자신의 역할을 의미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페르소나와 자신이 일치되는 내면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잘 생각해보면 한 개인이 결코 한 가지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의 예를 든다면 엄마, 아내, 주부, 작가, 학부모, 이웃주민, 형제, 친구, 취미인 등 수많은 역할을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경극의 변검술 부리듯이 순간순간 내가 써야 할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면서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는 이런 가면을 써줘야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써야 할 순간을 알고 있고, 어떤 역할에서 어느 정도 선을 긋고 행동을 해야 상대방이나 나에게도 큰 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거기까지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인생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캐스팅이 바뀌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내 인생에서 내가 완벽한 주인공이 될 때도 있고, 내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 단역처럼 살아가는 순간도 있다. 언뜻 들여다보면 매번 주인공을 맡을 때 행복할 것처럼 생각된다. 물론 내 인생의 캐스팅에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매 순간 주인공이 될 수는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된다. 내가 있으면 남이 있고, 조력자로서 타인과 밸런스를 맞추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냐 아니냐가 나의 행복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나답지 못한 불일치 시점이 연장되는 것이 행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마다 각자의 성향은 상이하다. 누구는 무조건적인 중심이나 리더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야 맞춤처럼 느껴지는 반면, 누구는 그 자리가 엄청난 부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타인을 조력하며 그림자처럼 지내는 것이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고, 가장 나답게 사는 모습을 찾으면 된다. 글로 써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생각보다 ‘나답다…’는 것에 자신의 취향과 성향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건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이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사실 필자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내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맞는 캐스팅은 무엇일지, 나에게 맞는 나다움은 어떤 것일지… 내가 무엇을 해야 가장 편안한 행복을 느낄까 고민한다. 하지만 인생은 내가 편한 것과 마냥 행복한 것만 누리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신은 인간에게 행복의 나눔과 상대성이라는 공평함을 선물해준 것 같다.


누구나 완벽함과 공허함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 모델 : Alina Nanu (체코국립발레단) / 사진 : 김윤식 (copyright.2017 김윤식)


다시 발레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좋아하고 응원하는 무용수가 좀 더 비중 있는 역할에 캐스팅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어느 발레 팬에게나 동일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레를 전공하고 발레리나(리노)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좀 더 무대 중앙에서 커튼콜을 하고 싶을 것이다. 팬들의 바람만으로 공연의 캐스팅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저 마음속 소원 빌듯이 좋아하는 사람 기대하며 기다리는 마음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발레 애호가로서 캐스팅 관계자들에게 제안을 해보라면 좀 더 다양한 무용수가 다양한 역할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싶다.



소리 없는 예술인 발레… 비록 무대 뒤 편에서, 또는 군무에 묻혀서 군무 14번이라든지, 소품을 뒤집어쓰고 나와서 얼굴 하나 나오지 않는 무용수라도 그들의 몸짓에 그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속 브라보를 외치는 관객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비록 당신 인생이라는 공연의 이번 캐스팅에서  예상밖의 어처구니없는 역할을 맡게 되어도, 누구 한 사람은 당신을 끊임없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인생의 어떤 캐스팅이든 나답게 해석하고 나답게 춤췄으면 한다.


내 갈길을 묵묵히 가는 모습은 가장 아름답다 / 모델 : Ayaka Fuji (체코국립발레단) / 사진 : 김윤식 (copyright.2017 김윤식)



글 : 취미발레 윤여사 @대한민국

사진 : 김윤식 작가 @체코

(첨부된 사진의 저작권 및 사용권은 김윤식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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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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