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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 21, 54권으로 시작됐다



프롤로그


"20, 21, 54권으로 시작됐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읽을 책이 없었다. 사실 우리 집 사방에 널리고 널린 게 책인데 내  눈에는 영어인지 과학인지 수학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 책뿐이었거나, 내 머리로는 절대 이해 못 하는 책들로만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변명인 것 같다. 나는 그저 긴 장문이나 따분하게 정해진 공식으로 설명하는 책이 싫다. 글밥이 많은 책은 별로 재미없고, 학교에서 읽으라는 필독서도 그닥 재미가 없었다. 책은 편하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책을 안 펴고 산지도 어느덧 반년… 한심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안 되겠다. 나도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이라는 걸 좀 읽어야겠다. 그렇게 어리고 작은 나에게 ‘커다란 사막 같은 집에서 바늘 찾기’ 같은 ‘책 찾기’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에 바늘(책)을 찾으러 간 곳은 공부방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내 수준에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책들 밖에 없었다. 시시하다. 두 번째로 찾으러 간 곳은 방음실. 왜 왔나 생각하며 1분도 안 돼서 나갔다. 그렇게 여러 곳을 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또 포기했다. 실망한 나머지 아빠께 조금은 속상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분으로 물었다.


“아빠, 우리 집에 재밌는 책 뭐 있어요?”

“우리 집에 책 많지. 코난 만화책도 있고.”


코난 만화책? 분명 만화책이라 하셨겠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명탐정 코난>이라면 TV 애니메이션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어도 그렇게 좋다 혹은 싫다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나는 아빠께 다시 여쭤보았다.


“그럼 그거 읽어도 돼요?”

“그럼, 읽고 싶으면 읽어.”


내 생각으로는 아빠도 ‘드디어 쟤가 책을 읽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다. 그렇게 기대에 찬 나는 조금 지나 책을 펼치자마자 다시 실망의 눈빛이 되었다. 흑백이었다. 3학년 당시 흑백 세상은 조상님들의 것이라 여기던 내가 실제 흑백 만화책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지… ‘역시나, 나는 책이랑은 거리가 멀구나’라며 책에 대한 마음을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마음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명탐정 코난⟫ 만화책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사실은 이렇게 책을 안 읽다가는 아주 똥멍청이가 되지 않을까 라는 혼자만의 걱정이 있기도 했다) 서서히 책에 내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못해 우리 집에 있는 코난 20, 21, 54권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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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다 읽었다.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10년 동안의 인생(?)에서 이렇게 무엇인가 훅 빨려 들어가는 집중력과 감정을 처음 느꼈다. 마치 평화로운 회전목마가 갑자기 번개를 뿜으며 시속 70km로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세 권을 읽고, 다시 읽고, 또다시 읽었다. 머리로 이해를 해야 하는 복잡한 책을 싫어하는 내가 눈을 부릅뜨고 며칠을 버티며 읽었다. 읽고 나니 아쉬운 게 있었다. 바로 54권 뒤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는 거다. (지금 생각하면 이래서 만화책은 한번 잡으면 놓을 수가 없는 마법의 책이다.) 하필이면 제일 궁금한 부분에서 끊기는 작가의 계략이 너무나도 괘씸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렇지! 해답은 아빠께 조르는거다. (역시 난 두뇌 회전이 빠르다) 그날부터 아빠께 ⟪명탐정 코난⟫을 사 달라고 부탁하는 계획을 무척 열심히 세웠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계획까지 세우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초3에 불과한 애가 살인 사건이 계속 나오는 만화책을 사 달라는데 과연 아빠가 쉽게 허락을 해주실까? 나름 초3치고는 꽤나 똑똑한 생각(이라 쓰고 잔머리라 읽는다)을 미리 했다. 코난 만화책 얻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나는 연습한 대로 아빠께 부탁하러 온몸을 꽈배기처럼 꼬고 눈을 똘망똘망, 깜찍하게 깜박거리며 다가갔다.


“아빠앙~~ 저 ⟪명탐정 코난⟫ 더 사주시면 안 돼요?”

“아린이 재미있어? 알았어. 몇 권 사줄까?”


원래 내가 세운 이후 계획은 사 달라고 물어보며 구체적으로 아빠를 설득하려 했는데 아빠는 내 생각과 다르게 너무나도 빠른 허락을 하셨다. 역시 초3의 사고방식은 여기까지였나? 아니면 내가 하도 책을 안 읽어서 그거라도 읽으라는 아빠의 깊은 뜻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아빠는 흔쾌히 뒤에 이어지는 코난을 주르륵 주문했다.


그날 이후, 매일 코난, 코난, 코난, 나의 하루는 아무튼 코난으로 이어졌다.


왼쪽-나를 '코난의 늪'에 빠지게 한 바로 그 책들 | 오른쪽-나보다 무려 12년 앞서 우리집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는 증거


글: 초등작가 아린

사진: 에디터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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