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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연애에 관한 고찰

by 현주영

살이 쪘다. 나도 모르게 정말 행복한 연애를 했는지 5kg 넘게 쪄버렸다. 성인이 된 이후로 몸무게의 앞자리 숫자가 바뀐 적은 없었는데, 어느샌가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체중을 재어봤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그간의 먹부림에 보답이라도 하듯 바뀌어 있는 앞자리는 당당했다. 이실직고하자면, 사실 연애 중에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운동하는 시간도 내팽개칠 만큼 둘이 치대는 시간이 그렇게나 재미났었나 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요즘 취미로 빵을 만들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심상 집에서 운동을 1시간 정도 한 후, 지하철을 타고 베이킹을 하러 간다. 살찌는 것을 걱정하면서 왜 하필 베이킹이냐고 한다면 사실 별 이유는 없다. 힘든 운동을 끝내고 난 뒤 일종의 보상심리인지, 아니면 공부와 일만 하느라 요리나 살림을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어서 결혼 전 나름 신부 수업하는 셈 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빵순이인데 요즘 빵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차라리 내가 만들어 먹고 말지라는 심리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배워 놓으면 언젠가, 어디에서, 어떻게든 활용하여 내 삶이 갓 구운 빵처럼 조금 더 따끈따끈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베이킹을 하면서 의외로 알게 된 점은 베이킹과 연애에 일종의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부분이다.


빵을 만들 때, 이스트를 넣은 빵 반죽을 열심히 치대고 나면 꼭 거치는 과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다.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갖춰진 환경 아래 혼자 가만히 내버려 두는 시간. 발효를 잘 거친 반죽은 2배에서 4배 정도 둥긋이 부풀어 오른다. 마치 보얗고 말랑말랑한 아기 궁둥이 같다. 반면에, 발효가 제대로 안 된 빵은 아예 부풀지 않거나 액체 괴물처럼 줄줄 흐른다. 고름이 살 될 리가 없다는 말처럼 이미 그릇된 반죽은 기사회생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반죽은 가차 없이 폐기해야 한다. 그것도 반죽인 채로 버리면 안 된다. 일반 빵과 똑같이 구워서 버려야 한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을 잘 보낸 사람은 그 스스로만으로도 두 배, 네 배는 커진다. 한낱 분내 나는 반죽에서 풍미 가득하고 탐스러운 숙성 반죽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빵 반죽처럼 열심히 서로 치댄 후에는 반드시 혼자 적당히 발효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시간에 내가 큰다. 어차피 똑같이 노릇하게 구워질 인생, 실컷 굽히고 나서 폐기 처분되느니 누군가에게 폭신폭신한 식감을 전달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보람차지 않은가.




베이킹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오롯한 내 시간이다. 사념은 사라지고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한 계량과 반죽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중요한 순간! 발효를 기다리는 시간이 심심할지언정 훌륭히 발효 과정을 끝내고 나온 반죽을 보고 있자면 가히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내 취향대로 모양을 내고, 오븐에 넣어 노릇하게 구워진 빵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오븐에서 막 나온 빵은 고급 버터가 내는 특유의 풍미와 더불어 윤기 나는 갈색빛의 구움 색이 완벽하다. 겉이 아직 뜨겁고 바삭한 빵을 두 손으로 찢어 본다. 결대로 찢어진 빵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속이 촉촉하게 살아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 성공이다. 노릇하고 고소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갓 구운 빵을 집에 가져간다. 퇴근하고 온 사람에게 일단 먹여 보자. 너도 한입, 나도 한입. 다이어트가 말짱 도루묵일지언정 이로써 우리는 행복한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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