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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키 Sep 14. 2024

길 위의 시

어떤 이는 길에서 시를 줍고, 어떤 이는 마음에서 시를 퍼올린다던데.. 나도 시 하나 주울 수 있을까 싶은 요량으로 길을 나선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몇 사람을 지나치고 강아지와 고양이와 버려진 물건들과 떨어진 꽃잎도 스쳤지만 그 몇몇의 사람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물건들과 꽃잎도 왠지 시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데가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서 시가 깃들지 못한 걸 지도 몰라.' 작심하고 아파트를 벗어나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그래도 길을 나섰으니 어디든 가보자.. 마음을 가다듬고 100m쯤 걸었을까. 시를 줍는 건 어림도 없다는 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부슬부슬 온 세상을 적실 듯하다. 우산도 없는데..  급한 대로 입고 있던 바람막이 옷깃 속에 말아 올려 숨겨진 모자를 펼쳐 쓰고 미끄럼틀과 몇 가지 운동기구가 놓여있는 손바닥만 한 공원의 정자 밑으로 파고든다.


비가 와서 그런지 몸이 떨린다. 정자의 마룻바닥은 깨끗하지만 한기가 돌아 앉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처마 끝에 서서 돌아갈지 말지를 저울질하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정자를 향해온다. 미숫가루 한 봉지와 양파 한 망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내려놓더니 털썩 정자에 주저앉는다.


"어디 살어요?"

못 들은 척하고 싶었지만 지척에서 대뜸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아주머니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조~기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내가 사는 아파트를 살짝 쳐다봤다.

"나는 용암동 사는데 딸네집에서 애들 봐주고 있어. 집에 갈래도 애들이 못 가게 허네"


시작은 이랬다.

손주들 이야기, 자녀들 이야기, 남편분 이야기.. 등등

"우리 아저씨가 철학관에서 사주 보는 일을 해서 돈을 음~청 벌었어. 근디 못된 친구 놈이랑 어울려 술집 드나드는데 돈을 쳐발라서 지금은 남은 게 읎어. 친구 놈은 벌~써 가뿌렸고, 우리 아저씨는 암인데 초기라서 내가 딸네랑 우리 집을 왔다갔다혀." 덤덤한 말투에 표정이 복잡했다.


'철학관을 해서 돈을 엄청 벌었다고?' 나는 의심했으며,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걱정했다. 아주머니가 짐이 무거워 보이지 않음에도,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노란 우산을 받쳐 들었음에도, 비도 오고 있음에도 정자의 사각 면 중에 굳이 내가 있는 쪽으로 와 정자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쪽 다리는 꺾어 올려 앉을 때부터, 말을 놓았다 말다 할 때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빗줄기가 사그라들지 않는 이상 어쩌면 아주머니의 인생을 통째로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머니에게 상대방이 듣거나 말거나 따위는 중요치 않아 보였고 나도 건성건성 듣다가 집중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문득 아주머니가 물었다.

"절에 댕겨요?"

평소 같았으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질문에 내가 반응을 보인건 얼마 전에 노스님과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인데 순간 내 눈에 감도는 생기를 아주머니는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포착해 냈고, 그렇게 아주머니 인생 썰 2막이 시작되었다.


"거기, 신탄전에 있는 거시기절 아나 모르겄네?!"

"그러믄 저~기 금산 아무개 절도 모르구?" 아주머니는 어느 절에는 비구니가 몇 분이 계시고, 어느 절에 있던 어떤 스님이 어디로 옮겨갔고, 어디 절 어느 스님의 점이 기가 막히게 용하더라는 등등의 이야기를 지금 막 절집 투어를 마치고 온 사람처럼 쏟아냈다..


내가 물었다.

"남편분이 사주도 보신다면서 남편분에게 보시지.. 굳이?!"

아주머니 얼굴 위로 난감함과 확신이 교차되는 찰나의 순간

'응, 영발이 달러.. 암..!'  아주머니의 중얼거림을 들은듯했다.

'그래, 가족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든 어떤 면에서든 냉정할 수가 없는 게 당연한 거지.' 내 점괘를 내 남편에게 묻는다는 건 뭔가 삑사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근데요, 절은 한 군데 정해서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으응, 아녀!" 아주머니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어디든 부처님은 똑같으니께!" 뭔지 모르겠지만 순간 어떤 깨달음 같은 게 느껴졌다.


찰랑찰랑 찰랑대네~

느닷없는 벨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지만 아주머니는 반갑게 휴대폰 속 언니를 불렀다. 수화기 저쪽에서 걸걸한 목소리의 언니가 17만 원과 카드가 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속상해했다. 나는 눈으로라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고 싶었지만 아주머니는 온전히 언니의 말에 집중했고 나의 존재는 잊은 듯했다.


슬그머니 자리를 뜨면서 생각이 났다. 시 하나 주우러 나와서 10원짜리 동전 하나 못 주웠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름 가득한 낯선 여인네가 늘어놓았던 넋두리 같은 이야기가 내 발길을 따라왔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지고 어쩐지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늘 치이고 인내하고 감당하다 알맹이가 사라져 버린 사람의 헛헛한 얼굴..


아, 이제야 알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투박하고 익숙해서 시인줄도 몰랐던 시 한 편과 마주했던 거다. 나는 두어 번 시를 써봤을 뿐이고 시를 쓸 감수성도 재주도 없지만 길 위에 시가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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