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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직 아무 소식도 못 들으셨습니까?

[미스터리 추리소설] 우리 집에 왜 왔니?

by 해달

“이…… 이게 뭐야?”




영상을 본 순간 큰 실망감에 나는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나름 심혈을 기울였건만, 녹화된 영상은 딱히 식별할 것도 없이 까맣기만 했다.




“젠장!”




증명할 수 없는 세계에 결국 영상을 모두 삭제한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곳에 뭔가 단서가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였다. 오승욱이 나타난 시점과 맞물려 무관하다 볼 수 없는 이유였다.


차근차근 오늘 일을 곱씹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니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쩌면 어머니는 청악산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그곳에 갇힌 걸지도 몰라.”




어머니 실종 이후 나는 밤낮으로 모친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27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까맣던 머리가 하얗게 세고 늘어진 주름에 처진 눈꺼풀이 눈빛만으로도 기운을 압도하던 무당 이을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기다 관절염 때문인지 절뚝임도 심했다.


다만 원색의 녹색한복, 매화꽃장식이 달린 비녀는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어머니는 분명 27년의 세월을 모두 감당하신 모습이었어. 그럼 대체, 언제 그곳에 가신 거지?”




답답한 마음에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머니가 사라진 건 27년 전이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어머니를 목격했다는 소문은 불과 3개월 전의 일이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어쩌면 박태식은 나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다 죽어가던 놈의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그런데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어머니를 두고 도망쳐 나왔다.




“산속에서 주양현과 어머니를 봤다는 은상댁 할머니 말씀이 정말 사실이라면 어머니를 그곳으로 데려간 놈은…….”




섬뜩한 상상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 실종 당시 경찰과 함께 샅샅이 훑었던 청악산이었다.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다면 절대 못 찾았을 리 없었다.




“연세 90에 치매까지 앓았다고 하니 은상댁 할머니는 헛것을 본 게 틀림없어.”




확인은 필요하나 확신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도출에 이르자 요동치던 심박수가 느려졌다.


세월을 감당한 어머니 모습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었다. 주양현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머니도 별일 없으실 테니.


그런데 순간 내 머릿속에 박태식이 떠올랐다.




“아, 안 돼!”




집으로 돌아가고자 어머니는 분명 강단 앞에 줄을 서고 계셨다. 그 의미인즉, 어머니도 곧 주양현 앞에서 어떤 죄를 고백하게 될 거라는 거였다.


만에 하나 어머니가 나와 무덤까지 갖고 가자했던 비밀을 털어놓으신다면…… 그리고 그것을 주양현이 알게 된다면…….


보나 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한가하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오승욱, 아니 주양현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이것저것 따져 물을 게 많았다.




“이번에는 또 뭐라고 둘러댈는지…… 하지만 더 이상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주양현, 넌 이미 다 들켰어!”




잔뜩 벼른 채 차량이 도로에 진입한 찰나였다. 불현듯 머릿속에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래. 그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내가 겪은 이 기이한 일들을 의심 없이 들어주고 모든 비밀을 풀어줄 한 사람.”




생각이 바뀌자 나는 곧장 차를 돌렸다.





***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다. 다행히 오는 길이 막히지 않았다.


며칠 사이 다시 문경에 내려온 나는 망설임 없이 곧장 고향집 앞에 차를 세웠다.




‘왜 진작 순이 생각을 못했을까……?’




이런 일을 겪기 전 순이를 만난 게 천운이었다. 그녀는 분명 오늘 내가 다녀온 세상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어머니를 만날 것도 이미 내다본 순이었다.




“어쩐지, 주제넘게 날 가르치듯 소나기처럼 퍼붓는다 했어.”




순이가 다시 찾아온 나를 반길지는 미지수였다. 하나 상관없었다. 뭐가 됐든 돌아온 주양현을 없애고 어머니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끝까지 질척일 작정이었다.



터벅터벅



다부진 마음으로 차에서 내린 내가 곧 낡은 빗장문 앞으로 걸어갔다. 속 시원한 답을 듣기 전까지는 문밖을 나서지 않을 양이었다. 시커먼 속내를 숨긴 악귀를 정희와 유림이 옆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을 포함해 내 인생 전부가 걸린 일이었다.




“문이 언제 이렇게 망가졌지?”




내 손이 손잡이로 뻗치다 말고 멈칫했다. 고향집을 다녀간 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사이 경첩이 떨어졌는지 왼쪽 문짝이 덜렁거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문고리도 사라지고 없어 살짝만 밀어도 당장 무너질 판이었다. 그나마 빗장이라도 풀려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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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이 정도로 망가졌으면 진작 수리를 했어야지. 쯧쯧.”




행여 문짝이 쓰러질까 조심스레 오른쪽 문짝에 손을 짚었을 때였다.




“거 누구요?”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뒤에 누군가 서있었다. 헬멧을 쓴 어떤 남자였다. 보아하니 스쿠터를 타고 골목을 지나가는 길인 듯했다.




“여기 지인이 살고 있어 잠시 인사나 하고 가려는데, 왜 그러십니까?”

“이 댁 주인을 아신다고요?”




헬멧을 벗고 스쿠터에서 내린 남자가 앞으로 걸어왔다. 대략 40대로 보이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 마을주민이었다. 다만 위아래로 나를 훑는 모양새가 적잖게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댁 지인이시라면서 아직 아무 소식도 못 들으셨습니까?”

“소식이라니요?”

“여기 보살님은 이미 한 달 전, 돌아가셨습니다.”

“모……뭐라고요?”




믿기지 않는 남자의 말에 풀린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종일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순박하게 생긴 눈앞의 농부가 혹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비벼보기도 했다.




“어이쿠!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이마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나를 남자가 부축했다.




“아……예. 괘, 괜찮습니다.”

“에휴, 보아하니 모르셨나 보군요. 하긴 뭐, 보살님은 아셨겠습니까?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니 원…….”




남자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순이를 보살님이라 하는 것을 보니 그녀를 깊이 알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날따라 보살님께서 시루떡을 만들었다며 집집마다 떡을 돌리시더라고요. 다음날 일찍 절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다면서요.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날이 떠올랐는지 남자의 입에서 다시 깊은 탄식이 이어졌다. 한눈에도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뭔가 미안한 감정마저 엿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글쎄 그날 밤, 보살님 댁에 강도가 들었지 뭡니까.”

“……강도요?”

“예. 나중에 경찰이 조사해 보니 불상을 놓고 보살님과 강도가 난투극을 벌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보살님이 불상을 꼭 끌어안은 채 죽어있더랍니다.”




‘순이가 죽어있었다.’는 한마디에 나는 비로소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때마침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코끝을 자극했다. 신선한 공기와 뒤섞인 퀴퀴한 재 가루 향이었다.




“보살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답니까?”




나는 본격적으로 사건에 대해 물었다. 내가 순이 방에서 목격한 불상은 분명 값나가는 금불상이 아닌 팔뚝만 한 돌불상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강도와 난투극을 벌였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흉부 서너군 데를 칼에 찔렸답니다. 게다가 강도가 집 주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죠.”

“저런…….”

“치솟는 불길이 아니었다면 보살님께 일이 생긴 것조차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다들 절에 들어가신 줄로만 생각했을 테니까요.”




조금 멀찍이 물러선 가운데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이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형상이 마치 먹구름이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나는 코를 찌르는 재 가루향의 의미를 깨달았다.


순간 숙연한 공기가 내 눈을 감겼다. 조금 더 일찍 순이를 찾지 않은 안타까움이었다.




“혹시, 시신이 훼손됐습니까?”

“아니요. 불길을 보고 모여든 마을주민들이 불을 끄려 했지만 워낙 불길이 사나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죠.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인지,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더라고요. 그 덕에 보살님은 목과 손등을 제외하고는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멀뚱히 남자를 바라봤다. 아니, 넋이 나갔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불과 며칠 전 순이와 마주 앉아 매실차를 기울이던 나였다. 단호했던 그녀의 눈빛과 음성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했다.




“범인은, 잡혔습니까?”

“예. 조현병을 앓던 30대 절도전과자였답니다. 증세가 있었음에도 약을 끊고 곳곳을 떠돌며 절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에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자의 모습이 막을 수 있는 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괜찮다면 안을 좀 들여다봐도 되겠습니까?”

“예 뭐, 폴리스라인도 치우고 했으니 보기만 하는 거야 문제가 있겠습니까.”




남자가 경첩이 떨어져 나간 문짝을 발로 건드렸다. 그러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 모서리가 땅을 찍었다.




“연고가 없다고 하셨던 보살님이라 장례는 그분이 다니시던 절에서 치러주셨습니다.”

“아, 예.”

“보아하니 오랜만에 들리신 듯한데, 이런 소식을 드려 제가 다 죄송하네요.”

“…….”




별 대꾸 없이 나는 내려앉은 문짝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고향집은 이미 흉가나 다름없었다. 창호지가 찢겨나간 불탄 미닫이문에 바짝 시들어버린 텃밭작물, 나뒹구는 빗자루와 대야, 짝을 잃은 신발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내가 다녀간 고향집은 대체, 어떤 곳이었단 말인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에 나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환상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매일이 오늘 같다고 한다면 미칠 노릇일 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목을 쭉 빼고 옆에 서있던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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