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잘잘못을 떠나 후회라는 건 결과를 바꿀 수 없을 때 하는 거라…… 어쨌든 지금은 마음먹은 건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편이에요. 후회 안 하려고.”
“그래서 유기견도 입양시켜 준 거고요. 맞죠?”
“네. 애초에 무관심한 것보다 관심주다 방치하는 게 더 비참한 결과를 낳잖아요.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주고받는 상처가 꽤 많죠.”
책임감 이야기가 나와서였을까……?
모친의 죽음 이후 마치 강박인 양 책임감에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재림은 매우 진지했다.
“근데, 이가인 씨는 아직도 제가 수호천사로 보이시나요?”
“……네.”
“허! 희한한 일이네요. 초등학교 때 짝꿍한테도 못 들어본 말인데.”
“저만의 기준이 있거든요.”
“혹시, 나쁜 남자 좋아하시나? 아니면 츤데레?”
가인이 말을 보태려는 찰나 재림이 걸친 외투주머니에서 요란한 폰 진동이 울렸다. 문자메시지였다.
잠깐 메시지를 확인한 재림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제가 공 선생님을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어서 가보세요.”
“가인 씨는 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느닷없이 물어오는 재림에 잠시 멈칫했던 가인이 대답했다.
“본 적은 없지만 하얀 날개를 가진 순결한 형상 아닐까요? 대게 그렇게 연상하잖아요.”
“제가 영상 댓글에서 본 바로는 천사는 악마를 쫓아낼 만큼 무섭고 악마는 인간을 유혹할 만큼 아름답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천사는 무섭고 악마는 아름답다…… 정말 그럴까요?”
되묻는 가인에 재림이 두 손바닥을 들며 어깨를 들썩였다.
“본 적이 없으니 저도 모르죠. 믿거나 말거나.”
익살스러운 재림의 눈웃음에 덩달아 가인이 따라 웃었다.
“공 선생님 덕분에 웃음을 되찾아가는 것 같아요.”
“좋은 현상인데요? 그럼 잘 들어가세요.”
가인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재림이 돌아섰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크지 않은 발소리가 마치 빈 수레바퀴처럼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고요한 동네였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재림이 멈춰 섰다.
“인간을 유혹하려면 악마는 그 탐욕을 끄집어 낼만큼 아름다워야겠지. 그래야 그 영혼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돌아선 재림이 가인의 저택을 바라봤다.
“이가인. 난 분명 가르쳐줬다.”
재차 울리는 폰 진동에 베일 듯 날카로운 재림의 눈빛이 전방을 향했다.
***
띠띠 띠띠띠띠띠 삐-
가인이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자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사소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쏴아아-!
현관 안으로 발을 디디던 가인이 느닷없는 물벼락에 그대로 멈춰 섰다.
“…….”
온몸을 적시며 일순간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앗아간 물줄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인은 누군가 자신의 보금자리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탁!
밖으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은 가인이 재킷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마치 웅덩이에 빠진 쥐새끼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연결음이 들리자 가인이 귓가에 폰을 가져갔다.
**
수현이 저택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채 15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급히 대문 안으로 들어선 수현은 비참한 몰골로 현관 앞에서 떨고 있는 가인을 발견했다.
“대표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가인의 몸은 차디차게 얼어있었다. 단지 몹시 화가 난 눈빛이 감정을 대변할 뿐.
“누군가…… 내 집에 들어왔어.”
파랗게 변한 가인의 입술이 진동이 일듯 떨려오자 수현이 경계의 눈빛으로 현관을 주시했다. 만약 도망치지 않았다면 괴한 또한 같은 눈빛으로 바깥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조금 전 수현은 가인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집으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그러나 물벼락을 맞고 떨고 있는 가인을 보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물은, 대체 뭔가요?”
“나도 모르겠어.”
“경찰에 먼저 신고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강도라면 흉기를 갖고 있을 텐데.”
“느낌이 안 좋아서.”
“네? 그게 무슨…….”
마침 이마를 타고 흐른 물방울이 가인의 눈꺼풀 위로 떨어지며 파르르 떨고 있는 속눈썹 위에 투명한 이슬처럼 맺혔다.
“도둑은 이런 장난을 칠 여유가 없거든.”
“알겠습니다.”
띠띠 띠띠띠띠띠 삐-
거침없이 현관문을 연 수현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밤 11시 27분. 수현은 환하게 불이 켜진 거실을 둘러본 후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괴한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였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수현이 집안 곳곳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문밖에 비켜선 가인은 약한 미열을 느끼며 두 손을 움켜쥔 채 무사히 수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현관문도 활짝 열어두었다.
가인이 경찰 경비보다 수현을 더 신뢰한 건 성인남자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수현의 싸움기술과 순발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벼락이라는 애송이 같은 장난질을 칠 존재라면 평소 그녀를 따라다니는 악질 유튜버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심리가 불안정한 스토커일 확률이 높았다. 일전에도 저택에 몰래 침입하려다 수현에게 잡혀 혼쭐이 났던 이력이 있었으니까.
기사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가인은 이번 역시도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사이 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오시죠. 아무도 없습니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가인이 감각 없는 발을 이끌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우선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차를 마실 작정이었다. 약한 미열이 지속되는 걸로 보아 방치됐던 젖은 몸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가인은 몸을 추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처음 가인에게 충격을 준건 거실 한쪽 벽면에서 사라진 가족사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가인의 발 앞에 활짝 웃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갈기갈기 찢긴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잘려나간 6살 가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모든 가구가 파손되어 있고 소파도 전부 칼집을 내놨습니다. 주방도 엉망이고 드레스룸 옷까지 모두 찢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사진은…….”
“대체, 누굴까……?”
역시 가인의 예상대로 값나가는 물건이나 현금 따위를 탐낸, 목적이 단순한 도둑은 아니었다. 차라리 도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으련만.
“그것보다 방에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앞장선 수현이 닫히지 않은 방문을 손으로 밀자 난장판이 된 현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아.”
가인은 말문이 막혀왔다.
그녀의 방은 가구가 많지 않은 단순한 구조였다.
킹사이즈 침대와 화장대, 자그마한 티테이블 정도가 가구의 전부였다. 그 외에 신상 의류를 보관하는 붙박이장정도가 있었을 뿐.
그렇게 8년을 써온 자신의 방임에도 차마 발을 디디지 못한 가인은 마치 남의 집을 구경하듯 멀찍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찢긴 옷들이며 화장품과 액세서리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화장대 거울과 다리가 부러진 티테이블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가인의 시선이 멈춘 건 아수라장이 된 방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넋이 나가버린 가인에 침묵하던 수현이 물어왔다.
가인의 침대 위에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하얀 원피스가 가지런히 펼쳐있었다. 그리고 원피스 위에는 거실에서 사라진 6살, 활짝 웃고 있는 가인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누군가의 인형놀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원피스 가슴 위로 깊이 박힌 식칼과 함께 주변으로 새빨간 피가 여기저기 튀어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어린 가인의 눈과 입에는 삐뚤빼뚤 엉망으로 지나간 오색 바느질이 되어 있었다.
가인이 넋을 잃은 채 침대 위를 바라봤다. 이 순간 그녀는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추측이 가능한 한 가지가 있었다.
평창동 연쇄살인사건.
“조금 아이러니한 게 이렇게 해놓고는 고가의 귀금속과 시계, 그리고 현금을 챙겨갔습니다.”
“도둑질까지 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연막이네.”
가인의 대답에 이미 예상한 듯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겁도 없이 저택에 침입한 괴한은 예고장을 남긴 연쇄살인마이거나 혹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나름 잔머리를 굴린 베테랑 도둑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괴한은 담벼락 뒤 쪽문을 통해 침입했고 정원에서 주방과 연결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쪽문?”
가인이 그제야 쪽문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녀의 반려묘가 사망한 후 자물쇠만 채워둔 채 방치한 문이었다. 하지만 쪽문 주위로 자라난 풀줄기가 문을 가려 바깥에서 쪽문의 존재를 알아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괴한이 쪽문으로 침입했다는 건 꽤 오랜 기간 그녀의 집을 맴돌았다는 의미였다.
“쪽문 자물쇠가 망가져있었습니다.”
“주방 뒷문도 열려있었다는 거지?”
“네. 매우 손쉽게 따고 들어왔습니다.”
생각에 잠긴 가인이 물끄러미 깨진 화장대 거울을 바라봤다. 깨진 거울 틈 사이로 비대칭이 되어버린 그녀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비치고 있었다.
그런 거울 속 시선을 가인은 피하지 않았다. 이면에 가려진 그녀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깨진 거울 속, 높낮이가 다른 가인의 두 시선이 거울 밖의 가인을 바라봤다.
처연하고 또 처연한 눈빛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오래전 깨져버린 그녀의 꿈.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은 가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또 다른 그녀가 보였다.
6살 가인은 마치 곤히 잠든 아이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런 아이 가슴에 누군가 칼을 꽂았다.
‘나는 죽어있었다. 아니…… 살해당했다.’
순간 가인의 심장에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