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우리 집에 왜 왔니?
“주양현이 누군데?”
정희가 되물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머지 꺼내선 안 될 이름을 내가 입 밖으로 뱉은 후였다.
“아, 새 소설 구상 중인데 주인공 이름으로 어떨까 해서…….”
“벌써 시작하려고? 어쩐지, 요즘 들어 부쩍 당신 멍 때린다 했더니.”
“내가 그랬어? 하하. 아이디어 떠올랐을 때 몰입해야 스토리가 안 깨지거든.”
“그래? 근데 전과 다르게 유난한 거 보니까 뭔가 엄청난 소재가 떠올랐나 봐?”
“어? 어.”
“무슨 장르인지는 몰라도 주양현, 이름 좋다!”
정희는 그저 소설 속 가상인물로만 받아들였을 뿐인데 괜히 내 심장이 뛰었다. 마침 창가를 넘어온 바람에 곱게 빗어 넘긴 정희의 단발머리가 휘날렸다. 목마를 리 없는 내가 마른침을 삼킨 순간이기도 했다.
“큼! 오늘따라 우롱차가 맛있네. 당신이 만든 약과랑 잘 어울려서 그런가?”
“마음이 가라앉아서 그래. 우러날수록 더 깊은 맛이 날 거야.”
귀 뒤로 머리를 넘긴 정희가 미소를 띤 채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스쳐간 바람처럼 주양현이 스쳐간 직후였다.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소평리
10년 만이었다. 내가 다시 고향에 내려온 건.
마을을 둘러싼 청악산의 울창한 푸르름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릴 적 뛰어놀던 개울가도, 페달을 헛디뎌 자전거바퀴가 빠졌던 논길 옆 도랑도 그대로였다.
빨간 벽돌집에 깨끗이 포장도로가 깔린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자로 잰 듯 일정하게 나뉜 논밭과 알알이 영근 문경의 오미자 밭이 짙은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탁!
도착한 지 20여 분만에야 나는 차에서 내렸다. 고향땅에 발을 내디딘 정겨움 따위는 내게 없었다.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다신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니.
하나 마을에서 나고 자라 마을에서 사라진 어머니를 나는 찾아야만 했다. 살아 계시다면 올 해로 77세가 되셨을 노모였다.
과거 청악산 신당에서 산제(山祭)를 지낸 어느 날, 어머니는 산을 내려오시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셨다. 내 나이 서른 살, 초겨울이었다.
이후 나와 정희를 비롯해 경찰과 마을사람들이 며칠간 샅샅이 산을 훑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27년이 흘렀다.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어머니에 대한 어떠한 소문도 듣지 못했다.
마을사람들은 늘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사라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 몰래 마을주민들이 천도재(薦度齋: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를 올린 이유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생사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로 인해 마을에 화가 내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나를 마을에서 내쫓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고향을 떠나는 날, 하나 같이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만나슈퍼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있던 느티나무 옆 작은 슈퍼였다. 그곳에서 10kg 포대 쌀을 구입한 나는 트렁크에 쌀을 싣고 다시 차를 몰았다.
슈퍼는 돌아가신 양 씨 아저씨 대신 장남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릴 적 나와 어울리기도 했던 5살 많은 형이었다. 눈 밑의 짙은 수두 흉터로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용한 무당집 아들을,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
***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차에서 내린 내가 빨간 기와지붕이 덮인 빗장문 앞에 섰다.
10년 전까지 내가 살던 고향집이었다.
“아직도 여기 살고 있으려나?”
문 가운데 달린 까만 원형 문고리를 살짝 밀자 기지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 변한 게 없네.”
너무도 익숙한 마당풍경이었다. 고작해야 감나무를 들어낸 자리에 들어선 작은 텃밭이 변화의 전부였다.
담장 아래 줄지어선 장독대도, 말라버린 녹슨 재래식 펌프도 그대로였다. 텅 빈 곡간 문이 떨어져 나간 입구 사이로 빗자루와 광주리가 나뒹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수면아래 기억들이 솟구쳐 오른 순간이었다.
스르르르륵
“뉘시오?”
격자무늬나무 살에 창호지를 붙인 미닫이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왔다.
“잘 지냈는가?”
“…….”
순이가 나를 알아보는 데는 몇 초의 정적이 필요했다.
우리 집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풋풋한 스무 살 처녀였는데 어느새 환갑을 넘긴 그녀였다. 고향을 떠나며 나는 순이에게 이 집을 주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52세였다.
나이를 먹긴 했지만 가는 반달눈과 까무잡잡한 피부, 야무진 입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얗게 센머리를 하나로 묶은 단발머리에 회색빛 승복, 의안을 낀 오른 눈까지…… 영락없는 순이었다.
다만 턱 아래로 보이는 주먹만 한 검붉은 흉터가 얼마 전 화상을 입은 듯했다.
“이 도련님 아니십니까?”
그제야 나를 알아본 순이가 툇마루를 내려와 고무신을 신었다.
나보다 5살이 많은 그녀였지만 순이는 늘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왔었다.
10년 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 순이와 나의 거리는 평행선이었다.
“묻고자 하는 게 있어 들렸네. 들어가서 얘기 좀 하지.”
***
방안은 단출했다. 낡은 서랍장과 작은 교자상, 구석에 정갈히 개어놓은 춘추이불이 전부였다.
다만 벽면에 붙여놓은 사각교자상 위로 팔뚝만 한 돌부처와 반야심경, 염주와 작은 촛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결혼은 하지 않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11살부터 시작된 계부의 지속적인 성폭행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무작정 도망쳐 나온 그녀였다.
당시 어머니는 느닷없이 내게 거두어야 할 생명이 보인다 하며 산을 오르셨고 산기슭 가운데 쓰러져 있던 순이를 발견하셨다. 그리고 곧장 그녀를 업은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계부의 폭행에 눈알이 터져 피범벅이 된 그녀의 오른쪽 눈 때문이었다.
“드릴 게 변변치 않아 죄송합니다.”
내가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쟁반을 든 순이가 방안에 들어섰다. 그녀가 내려놓은 찻잔에는 잣을 동동 띄운 매실차가 담겨 있었다.
“손수 담근 음식보다 귀한 건 없는 법이지.”
조용히 찻잔을 든 나는 곧장 잔을 기울였다. 새콤달콤 향을 머금은 따끈한 매실차가 혀끝을 자극했다. 곧 입안을 맴돌 암울한 쓴맛을 대비하는 예방주사였다.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한 건가?”
순이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물론 이어질 대답도 예상하고 있었다.
“한번 가볼까 합니다. 그 길에 어떤 진리가 있는지.”
“그럼 이제, 몸은 아프지 않은 겐가?”
“예. 잘 이겨냈지요.”
어머니가 순이를 거두고 3년 만에 그녀는 지독한 신병을 앓았다. 그러나 순이는 끝끝내 신내림을 받지 않았다.
“이겨냈다…… 어떻게 했지?”
“도련님 내외가 떠나신 후 매일 악몽을 꿨지요. 관절 마디마디 참을 수 없는 통증과 고약한 고열에 며칠씩 앓기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순이를 바라봤다. 괜찮다기보다는 결연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그 의미인 즉,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푹 꺼진 눈꺼풀과 좁쌀같이 일어난 푸석한 피부, 하얗게 센 윤기 없는 머릿결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당시 어떤 악몽을 꾸었었지?”
“매일 밤 꿈속에서 사방 검은손이 나타나 제 목을 조였습니다.”
“거짓말.”
“……예?”
“자네는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꿈속이 아니라 현실이었겠지. 자네는 귀신을 보는 눈, 영안이 있으니.”
“…….”
“말해보게. 감나무에 원귀들이 매달려 있는 것을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
그제야 찻잔을 든 순이가 목을 축였다. 감정을 엿볼 수 없을 만큼 무장된 얼굴이었다.
“양어머니께서 함구하라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대체, 이유가 뭔가?”
순이가 짧게 숨을 뱉어냈다. 근심 어린 숨소리는 아니었다. 되레 이제 올 것이 왔다는 후련함에 가까웠다.
“감나무에 매달린 원귀들은 도련님 생부이신 최서평일가의 원혼들이니까요.”
“모……뭐라고?”
“도련님 외할머님께서 최서평 가문에 주술을 걸으셨지요. 홀몸이 아닌 양어머니를 두고 혼례를 치른 최서평 가족에게는 독한 전염병을, 그 어르신 댁에는 기울어진 가세에 극심한 기근을 뿌리셨습니다.”
“…….”
처음 듣는 생부 소식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는 내게 단 한 번도 떠난 생부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생부를 포함한 친가소식은 마을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엿들은 게 전부였다. 물론 그마저도 떠도는 뒷담화였다. 하여 내가 건진 거라곤 생부의 사망소식뿐이었다.
그런데 순간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순이가 내 집에 온 건 내가 15살이던 해였다. 누군가에게 전해 듣지 않고서야 그녀가 알 수 없는 사연이었다.
“한데, 자네는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나?”
“양어머니께서 청악산 신당에 머무르실 때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게는 금기어와 같은 생부 이야기였다. 한데 고작 시중드는 순이에게 털어놓으셨다니…… 이것은 필시 내 귀에 전해질 것을 대비하신 게 분명했다.
“주술로 한 가문을 몰살시킬 만큼 외할머니 신기가 강했다고 하시던가?”
“예. 허나 실질적으로는 외할머님께서 모신 산신의 기운이 강한 것이지요.”
“산신의 기운이라…… 그럼, 산신께서 그리했다는 건가?”
순이가 잠깐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