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우리 집에 왜 왔니?
“아닙니다. 외할머님은 당시 딸을 버리고 혼례를 치른 최서평과 모진 매질로 따님에게 장애를 남긴 그 일가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산신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자, 외할머님은 악귀들을 불러들여 대가 끊기도록 가문을 몰살시키고 머리가 잘린 혼들을 감나무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도련님 나이 다섯 살 때 일이지요.”
할 말을 잃은 나는 어깨를 휘감는 오한에 매서운 한기를 느꼈다.
감나무에 생부의 혼이 매달려 있었다니…… 고향집에 사는 내내 내 아비는 나와 함께 있던 거였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자연스레 믿어질 리 없는 이야기였다.
“자네 말을, 정말 믿어도 되겠나?”
“제 말에 일말이라도 거짓이 섞여있다면 악귀들이 달려들어 제 사지를 찢어 죽일 것입니다. 맹세하지요.”
순이의 섬뜩한 맹세에 나는 의구심을 거두었다. 함구할지언정, 악귀들을 들먹이며 거짓말을 꾸밀 그녀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내게 그 감나무를 물려주셨지?”
“그것이, 그러니까…….”
막힘없던 순이의 입술이 처음으로 머뭇거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감나무를 노려보던 오승욱이 떠올랐다.
“내 앞날이 걸린 일이니 솔직히 말해주게.”
“……그 감나무에, 악령이 숨어있습니다.”
“뭐?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도련님께서는 정말, 모르시는 일입니까?”
되레 물어오는 순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훑는 게 영락없는 의심이었다.
“내가 알고 있었다면 굳이 자네를 찾아왔겠나?”
불쾌한 감정을 꾹꾹 누른 말투에 그제야 순이가 눈빛을 거둬들였다.
“외할머님께서 악귀들의 원력을 받아 주술을 부리셨으니 그 대가를 치르셔야지요.”
“대가라니, 무슨 말인지 나는 통 이해를 못 하겠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다시 말해주게나.”
나의 간청에 힐끗 나를 올려다본 순이가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뗐다.
“악귀들은 절대 대가 없이 권능을 주지 않지요. 외할머님께서는 악귀의 힘으로 최서평 일가의 씨를 말리는 대신, 도련님 가문의 명을 저당 잡히신 겁니다.”
말끝에 순이가 활짝 열어놓은 방문 사이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푸르른 청악산이 보이는 전경이었다.
“외할머님께서도 각오하신 일이었지요. 이후 일찍이 어르신께서 마당에 심어놓은 감나무 안으로 숨어든 악령들은 산신제를 올리던 어르신의 혼을 점령한 후 정신이 흐트러진 어르신을 청악산 절벽 끝으로 내몰아 결국 자결하게 하셨습니다. 악귀들을 섬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에 들어선 것이지요.”
차분한 순이를 따라 고개를 돌린 나의 시선이 청악산을 향했다.
때 아닌 산들바람에 문득, 불안이 밀려왔다. 사라진 어머니 또한 행여 악귀들에게 변을 당하신 건 아닐까 하는 우려였다.
“그럼 어머니도 결국, 외할머니처럼 악귀들에게 명을 저당 잡히신 겐가?”
“양어머니께서는 놈들의 미혹에 넘어가기 전까진 잘 버티고 계셨습니다.”
“뭐라고? 그럼 어머니도 놈들에게 넘어가셨단 말인가?”
흥분하여 묻는 나를 순이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깊은 연민이 어린 눈빛이었다.
“양어머니께서는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종국엔 들키고 말았지만요.”
무슨 영문인지 동문서답을 하는 순이였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런데 ‘들켰다’는 한마디가 몹시 나를 거슬리게 했다.
“들켰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
즉답을 피한 채 순이가 찻잔 위에 동동 뜬 잣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심히 고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진 순이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는 마을 밖에서 나를 낳으셨다고 했다. 물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외할머니가 악귀들을 불러들이기 전, 집안에 나의 체취가 베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이후 고향집에 들어선 나는 늘 동전크기의 금속이 달린 목걸이를 찼다고 했다. 악귀들로부터 나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이었다.
“도련님 나이 3살 무렵 악귀들을 불러들인 외할머님께서 최서평 일가에 복수를 시작하셨지요. 그리고 2년 후, 저주를 끝내며 잘 지나가나 싶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도련님께서 그만 떨어진 감나무 가지에 눈가를 찔려 피를 보이고 말았지요. 어찌나 자지러지게 울던지, 마을이 떠나갈듯 했답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왼쪽 눈가 흉터가 신경 쓰인 탓이었다.
뿔테안경에 가려진 눈가 흉터는 어릴 적, 감나무 가지에 찔린 상처였다.
“그럼 그때 외할머니께서 감나무 근처에 날 얼씬도 못하게 하신 연유가…….”
“맞습니다. 어르신께서도 도련님을 지키기 위함이셨지요. 그러나 피 냄새를 맡은 감나무가 매섭게 요동치기 시작하며 이 댁에 때 묻지 않은 제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순이는 괴담과도 같은 섬뜩한 이야기를 줄줄이 뱉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섭섭함을 넘어 미울 지경이었다.
“그럼 나 역시 악귀들 손에 저당 잡힌 운명이었단 말인가?”
“부정할 순 없지요. 허나, 도련님 존재를 들켜 그리된 건 아닙니다.”
“난 맹세코 단 한 번도 악귀들을 섬긴 적 없네.”
“30년 전, 도련님의 결단이 바로 그 맹세였습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불현듯 깊이 고뇌하지 않았던 30년 전 그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럴 리 없네. 거짓말처럼 순탄하기만 한 내 삶을 더럽고 추악한 악귀들이 편히 누리게 했을 리 없지.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분명 내게 운수가 대통한 팔자라고 하셨네.”
“바로 그것이 그놈들이 던지는 미끼지요. 육이 아닌 혼을 결박하기 위한…….”
말끝을 흐리는 순이를 나는 매섭게 쏘아봤다.
마치 작금의 일들이 운명이 아닌 내 선택의 결과라고 꼬집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내가 맹세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내게 감나무를 물려주셨다는 말인가?”
“악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니 그 어떤 신도 이 댁을 돌보지 않으셨지요. 맹세라는 것이 그리 무서운 법입니다.”
“허어…….”
심란한 마음에 나는 크게 한숨을 쏟아냈다.
순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림길에 서있는 듯했다. 더군다나 어머니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집안이야기였다.
“하나 묻겠네.”
“예.”
“자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지금 감나무 속 악귀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알아보지 못한다기보다 새 피조물로 여기고 있겠지요. 다만…….”
미약하나마 줄곧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던 순이였다.
그런데 말끝을 흐린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아시겠지만 감나무 앞에서 피를 보이시면 안 됩니다.”
“그 얘기는 귀에 피가 나도록 어머니께 들었네.”
“그것은 비단 도련님께만 해당되는 금기는 아니지요.”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
순간 묘한 긴장감이 방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내가 먼저 그 이름을 꺼내버렸다.
“자네 지금 혹시, 주양현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건가?”
“전 단지 유림이를 말한 것뿐입니다. 악귀들이 다시 피 냄새를 맡는 순간, 큰 화가 닥칠 테니까요.”
윽박지를 듯 왼쪽 눈을 부릅떴던 순이가 이내 우회하듯 시선을 내렸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겠다는 의도였다.
“말해보게. 악령들이 내 딸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도련님만 조심하시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퍽퍽한 고구마에 목이 멘 듯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뭔가를 말해줄 듯 말 듯 헷갈리게 하는 순이였다.
길은 알려주되, 스스로 가보라는 의미였다.
“정말 피를 내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는 겐가?”
“일개 사람인 제가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물며 귀신도 관여하지 못하는 게 세상사인데 말입니다. 다만…….”
잠시 숨을 고른 순이가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선택이라니, 무엇을 말인가?”
“도련님께서 택하신 길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지요. 장담할 순 없으나 곧, 때가 올 것입니다.”
“어떻게, 무슨 때가 온다는 거지?”
“그건 저도 알 수 없지요.”
단호한 말투가 재촉해 봐야 소용없을 양이었다. 순이는 늘 그랬다. 그녀와 나의 거리가 여태껏 평행선인 이유였다.
나는 가만히 순이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갈림길 앞에서 나는 선택했다.
“난 운세가 대통한 사주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네. 그러니 악귀니 맹세니 들먹거리며 날 흔들지 말게.”
“또 언제 뵐지 몰라 노파심으로 드린 말씀이니 깊이 담아 두지는 마십시오.”
“그래서 이제야 이 거대한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은 겐가?”
“아닙니다.”
“그럼, 어머니가 함구하라 하신 것을 내게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야, 때가 되었으니까요.”
순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겹도록 드나들었을 청악산을 바라보는 게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한데, 예까지 오신 연유가…….”
“어머니. 내 어머니를 찾고 싶네.”
“…….”
한참 동안 순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어머니를 찾는 것이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혹,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내 친구 주양현과 똑같이 생긴 놈이 내 앞에 나타났네. 30년 전 모습 그대로 말이야.”
말끝에 나는 가만히 순이를 살폈다.
신내림을 거부하고 승복을 걸쳤으나 분명 신기가 남아있는 기운이었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말을 아껴서는 안 되는 이유였다.
“그 스스로 주양현이 확실하답니까?”
“아니. 한데 그놈은 교묘히 날 헷갈리게 하고 있네. 감나무 원귀를 알아본 것도 그놈이니까……. 내 인생에 큰 고비가 온 건 확실하지.”
“…….”
“내가 왜 어머니를 찾으려는지, 이해하겠나?”
아침 일찍 출발한 탓에 이제야 중천에 뜬 해가 보였다. 때마침 무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는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뭔가 좋은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