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 김민철

나는 나를 어떤 모양으로 빚어낼까?

by 유영운

- 제목: <무정형의 삶>

- 저자: 김민철

- 장르: 산문

- 분량: 334쪽

- 독서 기간: 2025년 5월 16일 - 6월 30일 (6주. 소설과 병렬 독서하다가 방사선 치료 대기 시간마다 읽었더니 후반부 진도가 빨라졌다.)

- 별점: ⭐️⭐️⭐️⭐️⭐️

- 한 줄 평: 나는 나를 어떤 모양으로 빚어낼까?

- 읽게 된 계기: 어쩌다 책방에서 감각적인 표지에 반해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이미 구입한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가는 항암 치료 기간이었어서. 친구 재은은 서점에 갔다 하면 다섯 여섯권씩 사서 나오는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놓쳤으면 어쨌을까 싶을 만큼 좋았던 책.


아래의 내용부터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책 속 문장

운명이라 믿길 좋아한다. 나쁜 일이 들이닥칠 때 운명이라 생각해버리면, 금방 체념이 되면서 툭툭 털어버리게 된다. 운명인 걸 어떡하나. 나는 한낱 작은 인간일 뿐인데. 받아들여야지. 나아가야지. 이겨내야지. 반면, 잠깐 지나가는 기쁨을 운명이라 믿어버리면, 별거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대단한 무언가가 내게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같이 하찮은 인간에게 왜 이런 선물을 주시나요. 나의 꿈에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답해주시나요. 내가 뭘 그렇게 잘했나요. p.48

변하고 변하지 않는다. 친구를 보며 깨닫는다. 변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가 변했고, 변하지 않았고, 우리의 관계가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 변해서 놀라고, 변하지 않아서 웃음이 터진다. 변해서 새롭게 드러난 면이 감격스럽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기어이 변하지 않은 부분은 경이롭다 못해 어이가 없다. p.83

여기서 우리의 길은 갈라진다.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길이다. 우리는 서로의 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잘 걷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진하게 포옹을 하고 각자의 최선을 다해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서로의 길이 평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만큼 순진하진 않다. 다만 그 길 끝에서 우리가 다시 평온하게 만나길 바랄 뿐이다. 우리 각자가 바라는 우리가 되어서. 그러기 위해 저 멀리 근사한 꿈을 세워둔다. 불가능한 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능하게 만들 거니까. p.163

이 안전은 우연이다. 우연히 내가 저기에 없었고, 우연히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 우연히 내가 안전하고, 우연히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 일상이라 단단히 믿고 있던 지반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나의 안전은 얼마나 수많은 우연이 결합해서 기적적으로 찾아온 것인지. 이 안전에 필연은 없다. p.255

...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인간은 한 순간에도 여러 감정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 사람 얼굴 봤어?"라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단정 지으며 이야기하는가. 상대에 대해서 얼마나 주저 없이 간편하게 결론을 내리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의 얼굴로 살지 않는다. 한순간에도 정면과 오른쪽과 왼쪽 얼굴은 모두 다른 말을 한다. 로댕의 우골리노가 그랬고, 론 뮤익의 보트 속 남자가 그랬다. 그리고 매 순간의 우리가 그렇다. p.310

결국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정적인 돈 대신 넘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24시간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정된 삶을 지키는 대신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고 싶다. 그렇다면 너무 모든 걸 정하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목표 같은 건 당분간 잊는 건 어떨까. 40년 넘게 정해진 모양대로 살았는데, 앞으로의 모양도 정해져 있다면 조금 슬플 테니까. 무정형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 찬찬히 나만의 하루를 완성해내고 싶다.
자주 불안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의심할 것이다. 24시간을 받아 들고 한숨을 내쉬기도 할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 겨우 이거였나 고민할 것이다. 파리에서의 내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치의 반짝임을 챙기려 애쓴다면, 결국은 행복한 인생이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지난 두 달간 그랬던 것처럼. p.313


- 줄거리

20년 간 한 직장에 다녔다는 저자는 지독한 파리에 대한 짝사랑을 실현시킨다. 두 달간의 파리 살이로. 공원의 풍경, 미술 작품에 대한 매료, 새로운 치즈의 맛과 수채화의 감각. 그러나 저자는 파리를 낭만화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곳의 현실과 자신의 불안을 위트 한 스푼 담아 보여준다. 자신을 방문하는 두 명의 친구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주어진 시간에 대한 조급함, 그러나 나만의 반짝임을 잃지 않으려는 투쟁까지. 흔한 여행 산문집과는 다르다. 재미있고 공감이 가며 깊이가 있다.


- 느낀 점

몸이 아프면 복잡했던 모든 것이 간결해지며 한 가지의 목표에만 집중하게 된다. 나의 건강 회복. 그러나 치료 휴식기가 되면 종종 '나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음이면 결혼하고 나의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라 상상해왔어서 그런지. 앞으로 뭘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해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조급함에 공감했다. 동시에 잃어버렸던 작은 꿈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를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다는 생각도 그제서야 들었다. 조금 더 느린 시간 속에서 나를 둘러싼 작은 것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이 책을 통해 생겼다.


IMG_6225_2.jpg 공원. 책. 묵주. 커피와 물. 좋아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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