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 제목: 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
- 저자: 송봉모 신부님
- 장르: 천주교 묵상집
- 분량: 152쪽
- 독서 기간: 2025년 9월 1일 - 2일 (이틀)
- 별점: ⭐️⭐️⭐️⭐️⭐️
- 한 줄 평: 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 읽게 된 계기: 바오로딸 혜화나무에서 익숙한 신부님의 이름을 발견해 데려왔다 - 현재 신부님의 성경대학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다-. 집에 신부님의 <고통, 그 인간적인 것>이라는 책도 있는데, 그 책 이후에 나온 책 같았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고통, 그 인간적인 것>도 꼭 읽어보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부터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책 속 문장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같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필자 번역)
여기서 '십자가'는 '고통'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같이 자신의 고통을 안고서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제 십자가'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다. 나의 고통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그 누구도 내 고통을 대신 안고 갈 수 없다. 또 주목할 단어는 '날마다'다. '날마다'란 단어가 우리를 한숨짓게 할 것이다. 십자가를 어쩌다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안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은 삶의 실재이기에, 우리의 순례 여정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p.23-24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존 맥머레이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의 차이점을 밝히는데, 마치 우리의 믿음을 저울질하는 것 같다. 곧 거짓 종교의 제안은, 내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이렇게 가르친다. "두려워 마라. 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일들이 너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상당이 크다. 그러나 그것들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p.25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안타깝지만 고통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내가 그것을 수용하느냐 수용하지 않느냐의 문제이지, 해결하느냐 해결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그리스도교를 포함해서 세상의 종교들은 고통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에 받아들이고 초월하도록 이끌어 준다. p.35
고통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에게 성장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우리 생을 삼켜버릴 수도 있다. p.38
우리가 흔히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데,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바스타제인βασταξειν의 번역이다. 이 단어가 지닌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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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 십자가에 눌려 오직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선뜻 받아안고 가는 것이다. 안고 가는 것은 단순히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를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령 천근이나 되는 쇳덩이를 나른다 해도, 그것을 내 짐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나르려 할 경우에는 내적으로 힘이 생긴다. 하지만 남이 지워준 짐으로 여겨 억지로 해치우려 한다면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p.54-55
...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하면,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비참함이 아니라 고결한 자세로 악에 저항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 사람이 된다. 바오로의 언어로 표현하면, 악에 굴복당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존엄한 태도다.(로마 12,21) p.62-63
긍정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먼은 이를 '사건-믿음-결과의 연결고리'라 부른다. 우리는 흔히 '사건'이 곧바로 우리의 감정이나 행동이란 '결과'를 유발시킨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믿음'이란 연결고리가 있다. 이 믿음은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가리킨다. ... 그리고 내 해석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p.67-68
우리가 고통의 용광로를 거치면서, 숯덩이가 아니라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정말 주의할 점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뜻'이란 나에게 덮친 고통이 그분의 뜻이란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의 뜻'은 절망적인 고통 앞에서도 우리가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우리보다 더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때 그 말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곧 '하느님의 본래적인 뜻', '하느님의 상황적인 뜻',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이다.
하느님의 본래적인 뜻은 하느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은총과 사랑을 넘치도록 주시어 그들이 삶을 충만하게 자신을 완성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우리를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선으로 돌보시는 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하듯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지 죄인을 창조하신 게 아니다. 그러니 인간의 무법성과 잔혹함, 자만과 경솔, 탐욕과 무지에 의해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은 아버지 하느님의 본래적인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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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하느님의 상황적인 뜻이다. 하느님의 상황적인 뜻은 하느님의 본래적인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등장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무지와 경솔, 실수와 사악함 등으로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 불행에서 당신 자녀를 돌보려 하신다. 하느님의 상황적인 뜻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전능성과 그분의 지극히 선함과 연결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했듯이, 하느님은 악을 만드신 분이 아니지만 악이 발생할 때 그 악에서도 선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전능하시고 또 선하신 분이다. p.76-77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은, 모든 것이 결국에는 선을 향해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18.28)
아무리 어둠이 짙고 극성을 부려도 빛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 우리에게 닥쳐온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때에 고통은 과거의 한 부분이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다음 일을 행하신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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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황적인 뜻은 우리 편에서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특별히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상황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힘겹게 찾아 나서야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분의 뜻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주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선하심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이다.다시 말해 자살을 한다거나 간접적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간접적 자살이란 희망을 잃고 자신을 어둠 속에 방치하는 것이다.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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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이유는 하느님은 악이나 고통을 지어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고통이 하느님의 뜻인 이유는 하느님이 그 고통을 이용해서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보려면 그분의 상황적인 뜻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 p.83
우리가 애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느님께 고함을 지르고 원망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재난이 다 당신의 책임인 양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묵묵히 받아들이신다. p.101
고통 중에 자신을 다독이고 돌보기 위해서 우리가 자주 바라보아야 할 곳은 하늘이다. p.113
인간은 창조 세계를 대하면서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저절로 떠올린다. 나는 비롯 보잘것없고 미약하고 언젠가 스러질 들풀에 불과하지만 이 아름다움과 이 장엄함, 이 신비로움과 이 벅차오르는 광경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찾으면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탐색이 아니라 창조 세계가 펼쳐 보이는 진리를 직관하는 것이다. p.123
욥기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가. 첫째, 인간이 고통과 관련해서 하느님께 던지는 온갖 질문에 대해서 하느님은 어떤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 둘째, 그래도 고통이 있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그저 신비임을 알아들으라. 셋째, 고통에 갇혀있지 말고 하느님의 창조 세계의 장엄함과 아름다움 안에서 인생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얻으라는 것이다. p.127
신성한 자연 세계를 대할 때에는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신경심리학자 릭 핸슨은 아름다운 장면,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리고 입에서 절로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올 때 그 장면에 적어도 20초 동안 온전히 집중할 것을 권한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p.133-134
피조물로서 덧없이 스러지는 이슬처럼 살아가는 우리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영원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어찌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의 기쁨과 경이를 누릴 수 없다는 말인가! p.141
- 책의 구성
1부. 고통, 삶의 실재, 2부. 고진감래, 3부. 고통의 용광로에서 작품이 되기 위하여, 4부. 애도의 시간, 5부. 하느님의 창조 세계가 주는 위로로 구성된 이 책은 하느님 안에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주시는 새로운 힘을 통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안내한다.
- 느낀 점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라고 쓰고 '주님의 돌보심이다'라고 읽는다). 검사 결과가 좋자 모두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아직 제자리인 나에게 '안 아프지, 이제 너도 살아 봐.'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가족과의 갈등 때문에 죽고 싶다는, 그것이 이해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충동과 망상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지나가고 나면 그런 순간에 충동을 실현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지만,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하는 강한 원망은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성당도 나가기 싫어' '어차피 아무도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기도도 안 할래' 하는 유치한 고립감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을 하느님이 주시는 게 아니며 하느님은 자신이 지어내지 않으신 고통 속에서도 무한한 사랑을 보내주신다는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겐 일종의 해답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모르는 새 나는 나름의 방법으로 고통을 통과하고 있었던 건지, 모든 상실에 애도가 필요하며 (실제로 내가 없어진 머리와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두고 근래 자주 하던 말이다.)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항암 치료 기간, 그리고 힘들 때마다 동네의 논길과 공원에서 철새나 강아지나 오리를, 계절 변화와 날씨의 흐름을 열심히 좇은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는 신부님의 조언을 이미 실천하고 있어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알고 있지만 강한 고통 속에서 자주 잃어버리는 하느님의 상황적인 뜻을 알아보고 따라가자고, 그리고 무엇보다 믿어보자고 또 한 번 다짐하며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