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동생의 입원에 나는 아빠와 돌아가면서 병간호를 하기로 했지만 아빠가 간병을 온전히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동생이 입원한 병원은 나와 엄마가 사는 도시 귀퉁이에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도 버스로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수였던 나는 그렇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 병원에 가서 간병을 돕다가 저녁쯤에 집으로 왔다. 그리고 주말이 됐을 때, 엄마와 독립한 언니가 동생을 보러 찾아왔다. 좋지 않은 이유로 엄마와 나와 같이 살다 독립을 한 언니는 살이 조금 붙은 상태였는데, 나중에 엄마를 통해서 알고 보니 몸에 이상이 있어서 비정상적으로 체중이 불어난 상태라고 했다. 언니의 날카로웠던 턱선이 약간 완만해진 걸 곁눈질로 보며 나는 갈라지기 전에 그렇게 미워했던 언니에게 측은함을 느꼈다. 잘 살겠다고 나갔으면 아프지나 말지, 하면서.
그러나 감상에 깊게 빠지기 전에 언니는 내게서 동생의 상태를 파악한 뒤 병실을 나가 엄마랑 얘기를 나누었다. 나와도 마찰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엄마와 갈등의 골이 깊었으며 일을 하고 있던 언니는 간병을 하지 않기로 하고, 주말과 연차를 이용해 엄마와 내가 동생을 돌보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얘기가 마무리된 후로 언니는 떠나고, 나는 엄마와 함께 병실에 남았다. 엄마는 병원의 동의를 얻어 구속된 채로도 자꾸만 버둥거리다 지치면 늘어지고 조금 쉬었다 싶으면 다시 버둥거리기를 반복하는 동생을 착잡한 얼굴로 보았다. 나 어릴 적 이혼하며 친권도 양육권도 가지지 못한 채 쫓겨나듯 떠나 동생이 입원하기 겨우 몇 년 전부터 주말에 가끔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엄마의 회한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고, 나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묵묵하게 간병을 할 뿐이었다.
주말이 지나고 아빠의 간병 차례가 돌아왔다. 엄마는 출근을 위해 돌아갔고, 나는 병실에서 꿈틀거리는 동생과 함께 남았다. 그러다 병실 문이 열려 일어나니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동생은 코에 호스를 달았지만 목까지 차오르는 피가래를 주기적으로 빨아내야 했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나는 피가래를 빨아내는 기구의 삽입이 괴로워 몸부림치는 동생을 보면서 항상 이 괴로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기다란 관을 타고 나오는 노란 가래와 새빨간 피, 구속된 채로 헛구역질을 하며 몸을 떠는 동생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작업이 끝나고 아빠가 왔다. 아침에 가래를 빨아냈고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며 전달하는 내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장군 잘 있었냐며 동생에게 다가가 구속용 끈을 풀었다. 내가 뭐 하는 거냐며 말리자 아빠는 몸부림 탓에 침대 시트에 쓸려 붉게 일어나고 살갗이 벗겨지는 동생의 피부를 보면서 아빠가 있을 때는 괜찮다며 계속 끈을 풀었다. 아빠의 고집에 나는 이번에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뭐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고성을 지르며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냐고 묻더니 멀쩡한 소변통을 두고 동생을 일으켜 부축해 화장실로 갔다. 나는 소변통이 있다고 했지만 거기에는 동생이 볼일을 잘 보지 않는다며 꾸역꾸역 변기에 앉혔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꾹꾹 억눌렀다.
자기 마음 편하자고 싫어도 해야 되는 일에서 늘 동생을 벗어나게 하는 건 아빠의 주특기였다. 때문에 동생은 제멋대로 자라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하고 마구 뛰어다니고 물건을 부쉈다. 때로는 나와 있을 때 부엌에서 칼을 들고 오기도 하고 컵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건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빠는 늘 그런 동생을 방치했다. 어릴 적 어느 날은 같은 방에서 자다 잠결에 툭 건드렸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눈을 주먹으로 맞고 울며 아빠에게 갔을 때, 아빠는 인상을 찡그리며 나중에 혼낼 테니 가서 자라며 등을 보였다. 황당함에 눈물을 그치고 방으로 돌아갔을 때 동생은 아직도 화가 난 상태로 내게 달려들었고, 흠씬 두들겨 맞은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아빠와 새엄마가 방에서 기어 나와 동생을 말렸다. 아빠는 제 잠을 깨운 자식새끼들이 짜증 나 동생을 후려치고 잠도 안 자고 지랄이라며 쌍욕을 했고, 새엄마는 그만하라며 말렸다. 거기에서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나중에 방을 나누어 따로 자게 됐지만, 상황은 여전했다. 동생이 내게 폭력을 휘두르면 아빠는 화를 내며 동생을 때리고, 우는 동생이 안쓰럽다고 품에 안고 달래주었다. 나에게는 늘 이해하라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제 기분 내키는 대로 굴며 동생을 후레자식으로 키웠고, 동생은 자기보다 힘이 센 아빠 눈치만 보며 다른 가족들은 전부 무시하는 안하무인이 되었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다음 차례에 간병을 해야 하는 엄마나 나는 체구가 작고 힘이 없어 동생을 부축하여 화장실로 옮길 수 없었다. 그랬기에 소변통이 필요했고, 동생이 힘들어해도 그쪽에 소변을 볼 수 있게 기다려줘야 했다. 아빠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죽겠다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자기 하고픈 대로 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면 동생은 또 소변통에 쉬이 볼일을 보지 않고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며 구속된 채 사지를 휘저을 것이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가래가 끓어 잘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질러대며, 피가 나도록 살을 시트에 문지르며.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자기 눈에 안쓰러우면 해결해야 하고, 보이지 않으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나는 왜 내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 꼴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나?
우울감에 젖어 절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아빠는 병실 밖에서 통화를 하고 오더니 곪아가는 내 속도 모르고 쫓아와 황당한 말을 했다.
'아줌마 남편이 아줌마를 납치한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아줌마는 아빠와 사귀는 거진 새엄마 수준의 여자이면서 버젓이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