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검사까지는 약 두 달이 걸렸다. 원래는 한 달이면 됐으나, 미리 작성한 문답지를 놓고 오는 바람에 집에 돌아갔다 나오느라 예약 시간을 놓쳐버려 검사가 한 달 뒤로 밀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ADHD 아니면 지능에 문제가 분명히 있겠다고 스스로를 욕하며 다음에는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병원에 미리 문답지를 내고 돌아왔었다. 그리고 시간은 어찌어찌 지나가 다시 검사일이 되었다. 매번 진료실로 들어가느라 지나치기만 해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던 상담실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인상의 전문상담사가 나를 맞이했다. 그는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무슨 검사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다양한 검사를 하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중간에 점심시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고, 곧 검사가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검사 몇 가지가 섞여있어 신기해하면서도, 나는 곧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자진해서 검사에 응했음에도 흥미가 떨어져 집중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아무도 몰래 힐난하고 달래면서 장장 7시간의 검사를 마치고 간단한 소감을 말한 뒤 나왔을 때는 후련함보다 피곤함이 앞서 쉬고 싶었다. 수납도 이전에 마쳤고 결과는 2주 뒤에 나온다고 했기에 나는 지체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없는 집중력을 끌어다 쓰니 피곤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2주 후, 병원에서 검사결과지를 받아 카페로 나왔다. 나는 철심으로 찍힌 서류 두 개가 든 봉투를 받았는데 하나는 종합주의력검사지였으며 앞쪽에 전체적인 검사 결과 설명과 종류별 세부 그래프가 있었다. 결과 설명에는 ADHD 의심 소견이 나왔다. 그 뒤에 남은 건 지능검사가 포함된 심리학적 평가보고서였는데, 내가 집중해서 볼 것은 거의 여기에 적혀있었다. 다행히 지능은 평균으로 큰 문제가 없었고, 고기능 ADHD일 확률이 높지만 정서적인 영향이 큰 탓에 정서문제부터 개입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취직난을 겪으며 우울과 불안이 증세가 증폭되는 경험을 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쉬웠다. 나는 담담히 결과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과거력에 대한 긴 분석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심리적 외상이 지속, 심화되어 왔겠다.’ 라는 부분과 상담 시 ‘과거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정을 올리지 않았는데, 현재는 지쳐서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은 상태이거나, 감정이 잘 접촉되지 않았던 상태로 보인다.’ 라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 문구를 오랫동안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쳐있는 상태구나. 감정조차 끌어올리기 힘든 거였구나. 나는 그런 내가 너무나 안쓰러워서 시끌벅적한 카페 속에서 잠시 침묵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니 나 스스로를 위해 묵념이라도 해야 했다.
묵념을 마친 나는 생각보다 큰 검사지를 넣을 가방을 급히 사고 서류를 보이지 않게 숨긴 채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이 가득한 것도 적혀있었기에 같이 사는 엄마에게 보여서는 안 됐다. 이것을 들켜 욕을 먹는 건 감수할 수 있어도, 쫓겨나면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짐과 함께 내쫓겨 길바닥에 나앉는 상상을 하며 나는 스스로가 한심해 헛웃음을 지었다. 애써 모은 적금도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퇴사 후 야금야금 써서 해치운 탓에 제 몸 하나 의탁할 방 한 칸 얻어 나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결과지를 고이 모셔와 숨겨놓고 이따금씩 마음이 힘들 때마다 꺼내보았다. 변하는 것은 없었지만 ‘의미있는 대상에게 상처받고 분노하는 마음이 갈 곳을 잃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냉소로 향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부분을 보며 불쑥 부정적인 감정이 치밀 때 이것이 애먼 내게 자기 비판적으로 날을 세우지 않도록 다독일 수 있었다. 나라도 나의 아군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이 주는 의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취직이 급해 구인사이트에 쉴새없이 구인공고글이 올라오는 블랙기업에 들어가 부당 대우를 받고 그만두는 일을 반복하며 마음이 썩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떨어져가고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집에만 박혀있는 나를 엄마는 답답해했고, 닥치면 다 하게 된다며 아무데나 들어가라고 종용하면서 계속 내 적금이 얼마인지 확인했다. 엄마는 당신 좋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엄마는 본인의 저금에 내가 모은 돈을 보태 더 크고 넓은 집으로 이사가기를 원했다. 독립 후 엄마와 연을 끊을 생각까지 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각했던 나는 기가 찼다.엄마는 내게 그런 걸 기대할 자격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아빠 아래서 성장하던 나는 타지역으로 이사를 가게되어* 다니던 학교에서 멀어지게 되자 학교가 있던 지역에 엄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생활습관이 달랐던 우리는 자주 부딪혔고 결국 싸우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엄마가 화해하자며 마련한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좀 더 가족같이 지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비웃으며 한 마디로 나를 짓밟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아니니?
나는 엄마에게 가족이 아니었다. 피붙이라는 연과 낳은 자식이라는 의무감으로 같은 지붕아래 살고 있을 뿐이지 가족으로서의 애정을 기대하면 안 됐던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끔찍하고 잔인하게 내게 선언한 엄마는 그 이후 내가 두는 거리에 대해 서운함을 내비칠 때가 있었다. 나는 그 때마다 과거가 떠올라 상처를 후벼파였고, 점점 엄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표출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곯게 만들었고, 나는 계속 이렇게 버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점점 부풀어올랐고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게 터지고 남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의 목숨마저.
*아빠는 당시 음주운전 후 접촉사고를 낸 뒤 피해자의 합의 요구를 거절하고 집으로 도망쳤으며, 음주 사실을 안 피해자가 아빠를 따라와 경찰에 신고했었다. 당시 타지역에 근무하던 아빠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