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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청 Sep 27. 2024

엇나간 분노의 방향

굴절되는 감정



 딸에게 협박문자를 받았다는 엄마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일이 고되어 살이 빠진 얼굴이 더욱 수척해 보였고,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다급해 나의 잠을 달아나게 했다. 나는 내 몫의 짐을 싸며 엄마에게 무슨 상황인지 캐물었지만 엄마는 언니가 칼 들고 쫓아와서 죽인다고 하는 말만 반복했기에 나는 그에 대해 더 묻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엄마 애인의 집이라는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가지 않겠다고 버티기에는 엄마가 너무 불안해하고 있었다. 일단 나중에 나 혼자 돌아오더라도 지금은 같이 나가야 했다.


절연까지 이어진 새벽의 난리 후 3년 만에 찾아온 새로운 파란에 나는 또 속절없이 휩쓸렸다.




엄마의 차를 타고 모르는 아파트단지에 들어서자 엄마의 애인이 마중을 나와 주차안내를 하고 엄마의 짐을 들었다. 나는 내 몫의 짐을 단단히 쥐고 그의 집에 들어섰다. 신축아파트인 그의 집은 넓었지만 너저분했다. 엄마는 그곳에 수시로 들락거렸기에 낯설어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는 이전의 일이 있었기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칼을 들고 쫓아온다는 언니 때문에 짐승의 소굴로 피신했다는 웃기지도 않는 사실이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지만 나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그를 내비치지 않았다. 나마저 짐이 될 수는 없었다.


 엄마는 불안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기에 거실에서 애인과 함께 있기로 하고, 나는 침대가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당장 오늘 아침에 주말 당직을 서러 가야 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생각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는데 엄마가 자냐며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나는 갈아입는 걸 마치고 문을 열었다. 엄마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 어려있었다. 엄마는 내일 당직을 어떻게 할 건지 물었고, 언니가 내가 일하는 자체를 몰랐기에 회사는 가겠다고 했다. 출근 방법에 대해 얘기하는 엄마가 피곤한 걸 알았지만 나는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휴대폰은 왜?"

 "언니가 뭐라고 했는지 보게. 내용은 알아야지."


 엄마는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하면서도 내게 휴대폰을 주었고, 거기에는 언니의 울분이 가득 담긴 메시지가 보였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언니는 아빠에게 들볶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내팽개친 아빠와 동생을 돌보느라 언니는 많이 힘들었고, 나이가 있는데도 계속 알바를 전전하는 나와 동생에 대한 돌봄을 내려놓은 엄마를 죽도록 원망하고 있었다. 쫓아와서 칼부림을 하겠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한참 전부터 중증우울증을 앓고 있어 제 몫의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안쓰러우면서도, 아빠에게 쏟아낼 원망마저 우리에게 토해내는 강약약강의 자세를 가관이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이나 자가용 명의가 동생과 아빠에게 묶여있어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이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엄마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고 엄마는 일단 여기서 며칠 있으면서 대책을 세워보자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고, 엄마는 거실로 돌아갔다. 작은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며 낯선 거울 속에 선 나를 보았다. 나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앞으로의 출퇴근이나 운동 계획에 대한 생각은 싹 지워지고 하나의 결론만 남았다. 당직을 마치는 대로 나는 홀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출근 전에 이야기를 꺼내면 당연히 엄마가 극구반대를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출근을 한 뒤에 점심시간에 엄마에게 퇴근 후 우리 집으로 가겠다고 얘기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덤덤하게 어차피 언제까지 숨어살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기나긴 한숨 끝에 엄마는 알았다고 했고, 집에 갈 때 전화하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걱정된다며 애인 집에서 다시 짐을 싸들고 나와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출퇴근 시 꼭 연락을 하기로 정해놓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당시 혹시 몰라 구입한 호신용품은 아직도 내 가방에 달려있다.


 사실 이렇게 엄마의 애인집으로 피신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아빠가 고모와 같이 아파트 입구에서 엄마를 붙잡았을 때도 우리는 엄마의 애인 집으로 피신했다. 그래도 그때는 아빠의 눈을 피하기 위해 토의 끝에 움직였던 거지 이렇게 목숨을 위협받고 쫓기듯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원치 않는 만남을 피하기 위함임은 같았지만, 짐을 싸서 나올 때의 비참함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걸 조금이라도 방치하고자 그 뒤로 엄마와 나는 정한 대로 꼭 퇴근 시 연락을 주고받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으면 공유했다. 사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면접을 보고 돌아올 때, 언니가 사는 동네를 지나치느라 버스에서 언니를 본 아찔한 경험도 있었지만 그 후로는 그곳에 지나갈 일이 없어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아빠나 고모도 더는 찾아오지 않았고, 내가 엄마의 휴대폰을 받았을 때 언니를 차단했기 때문에 술기운이 넘치는 원망의 메시지를 받을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중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종종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가빠오는 느낌을 받았다.


공황증세가 내게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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