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랐건만 나는 다음 날 멀쩡히 눈을 떴고, 아빠의 연락을 무시하며 지냈다. 그러다 연락을 끊은 지 며칠 뒤, 아빠에게 문자 하나가 왔다. 동생이 곧 퇴원한다고. 나는 의아해하며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가 병원에 있을 때 ㅇㅇ이 염증 수치 아직도 높다 그러지 않았나? ㅇㅇ이 퇴원한다는데?"
"니 애비가 돈이 없나 보다."
엄마는 바로 본질을 꿰뚫었다. 엄마는 생각을 하더니 일단 병원비가 얼마인 지 알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보태라고 말하며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상황을 파악해야 했기에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지난 새벽의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내게 왔냐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뻔뻔한 자태에 속이 뒤집힐 듯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멀쩡한 얼굴로 평소같이 구는 건 아빠의 천성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버티기 힘들었다. 상황만 파악하고 가고픈 마음에 본론부터 바로 들어갔다.
"애기 다 안 나은 것 같은데 퇴원해도 된대요?"
"병원 왔다 갔다 하면서 약 먹으면 된대. 퇴원한다고 했어."
"벌써요? 병원비는요?"
"이제 내러 가야지. 근데 아줌마가 와서 간병했는데 간병비를 줘야 돼. 와서 며칠 고생했어."
나는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고 잠깐 통화를 하겠다며 복도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얘기를 들은 엄마는 알았다며 내 통장으로 간병인 아줌마 몫의 오십만 원을 부쳤다. 그 돈 안 줘도 되지 않냐는 내 말에 엄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냥 주라고 했고, 아빠에게 따로 퇴원 소식을 전해 들은 언니는 이미 이십만 원을 보탰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못마땅한 나는 애꿎은 입술만 씹으며 병원에 있는 현금 인출기에서 엄마가 준 돈에 내 돈 이십만 원을 보태서 칠십만 원을 뽑아 봉투에 넣고 아빠에게 전해주었다. 그 사이 병원비 수납을 마친 아빠는 돈봉투를 받고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염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속으로 욕을 하며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말했다. 아빠 혼자 동생을 어떻게 돌보냐며, 당연한 듯이 집에 가자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 인간들과 부대껴야 했다.
휠체어로 옮겨져 아빠의 부축으로 뒷좌석에 겨우 탄 동생은 본가로 가는 내내 계속 병든 닭마냥 고개를 떨구다 누워버렸고, 나는 그 꼴을 보다 착잡한 심정으로 창밖을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하루이틀 있다가 도망쳐올 생각밖에 없었다. 끔찍한 새벽이 불과 며칠 전이기도 했지만 동생이 입원하기 전날, 아줌마가 끓여다준 된장죽을 먹지 못하고 흘리는 모습을 본 그가 동생에게 욕을 하며 머리를 후려치는 것을 막아서며 아픈 애한테 왜 그러냐고 소리치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늘 내키는 대로 행동해야 하고, 남의 사정 따위는 항상 뒷전인 인간과 내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환자 둘을 포용할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본가에 도착해 동생을 방으로 옮겨놓은 아빠는 아니나 다를까 내게 얘기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동생이랑 있으라고. 즉, 술을 마시러 간다는 소리였다. 항상 냉장고에 술을 사다 놓고 매일 집 안이든 밖이든 술을 마시기 여념 없던 알코올중독자의 성실함이었다. 말릴 생각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빨리 들어오시라는 말 뿐이었다. 거기에 얼마큼의 진심과 간절함이 있었는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나는 아빠에게 기대치가 바닥이었고, 가정의 붕괴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지만 그건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몇 시간 뒤, 아빠는 예상대로 거나하게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착실하게 가르친 대로 소변통에 용변을 보는 걸 극구거부하고 일어서려 발버둥 치던 동생을 본 아빠는 자기가 화장실에 데려가겠다며 동생을 부축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 달려가니 동생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아빠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둘 다 바닥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둘의 상태를 살폈다. 아빠는 완전히 취한 탓에 아파하면서도 별 거 아니라며 실실 웃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큰 외상은 없었기에 피를 흘리던 동생을 살폈다. 입에서 흐르던 피는 입술이 터져 나는 것이었고, 눈썹뼈 위쪽에 혹이 생겨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동생을 잡고 있으라고 하고 구급대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주소를 불렀다. 약 십여 분만에 구급차 사이렌과 함께 구급대가 도착했고, 스스로 걸을 수 없는 동생은 들것에 실려 옮겨졌다. 작은 혹은 이미 주먹만 하게 부어있었다. 환장할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구급차에는 보호자인 아빠를 실어 보냈다. 빠져나온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자 그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아줌마한테 연락했으니까 둘이 같이 오라고.
그 아줌마란 동생에게 된장죽을 끓여주고 아빠와 함께 새벽에 사라졌던 인면수심의 짐승,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은 차를 끌고 왔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내 눈치를 살피다 묻지도 않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했다. 거진 한 귀로 듣고 흘렸기에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듣는 내내 기분이 더러웠을 뿐이었다. 나는 당시에 어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자가 아니었다. 나는 자라면서 새엄마를 숱하게 새로 맞아왔고, 늘 여자에게 추근대는 아빠와 함께 살았으며, 남녀 둘이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뒤늦은 저녁을 먹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멍청하고 어수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그 여자는 내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믿건 말건 상관없었을 것이다. 자기 마음만 편해지려고 지껄인 말들임을 이제는 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고 동생의 상태를 살폈다. 다른 이상은 없고 바닥에 부딪혀 찢어진 입술을 여섯 바늘 꿰맸단다. 아빠는 취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응급실 밖 의자에 앉아 술에 절은 한숨만 연신 내쉬고 있었고, 간병인은 나와 아빠를 번갈아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간병인을 밖으로 불러 말했다.
"앞으로 아빠 연락 안 받고 연 끊을 거니까 아빠랑 ㅇㅇ이 잘 챙겨주세요. 저 갈게요."
간병인은 그저 알았다고 했고, 나는 아빠가 쫓아 나오기 전에 집으로 향했다. 동생을 입원시킬 병원에 데려갔을 때처럼 날이 너무 좋아서, 속이 이상했다.
간병인이 말을 어떻게 전했는지는 모르나, 아빠는 말 그대로 난리를 쳤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주변인까지 동원해 내 전화기에 불이 나게 만들었다. 아빠 친구라는 사람은 아빠가 자꾸 어디를 가겠다고 한다며 빨리 오라고 했다. 나는 한여름 길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며 분에 차서 대꾸했다. 도대체 내가 쫓아가서 말려진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상대는 그쪽이 딸 아니냐며 기가 막혀했지만 나는 안 간다고 못을 박으며 그 번호를 차단했다. 다른 번호로 메시지 하나가 또 왔다. 아빠가 자기 앞으로 쌓인 채무를 정리해 내게 보낸 것이었다. 기가 막혀 메시지를 지웠다. 그 뒤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때마다 차단했더니, 얼마 안 가 고모에게 연락이 왔다. 당연히 받지 않았던 내게 고모는 문자를 보냈다. 아빠가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해서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고. 나는 가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아빠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고모 번호도 차단하고 오로지 같이 사는 엄마와만 교류하며 집안에 박혀 지냈다.
근데 죽는다고 약을 집어넣고 중환자실에 갔다던 아빠는 멀쩡한 자태로 고모까지 동원해 엄마가 사는 아파트 입구까지 쫓아왔다. 주말마다 동생이 집에 올 때, 근처에서 내려주고는 동생과 내가 어디로 들어가는지 몰래 지켜보고 있다가 엄마가 사는 동을 유추해 내고 출근시간대에 기다린 것이었다. 아빠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고 엄마가 말했다. 도대체 여기까지 쫓아와서 무슨 말을 했냐는 나의 말에 엄마는 대답했다.
"그 여자랑 다 정리했다고, 같이 살자더라."
"아줌마? 간병인?"
"누군지는 모르는데 아무튼 정리했으니까 같이 살자고 하고 니 고모까지 데려왔더라."
정말 미친 인간이었다. 그 와중에 혼자 와서 말할 용기가 없어 고모까지 대동한 아빠의 찌질함에 나는 아직도 떠올릴 때마다 치를 떨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