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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청 Sep 23. 2024

분열의 시작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된 그날



난데없는 휴대폰 진동에 눈을 뜨니 새벽 1시 56분이었다. 지역번호가 찍힌 밝은 화면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기 ㅁㅁ병원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들려온 말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환자는 병원 복도 바닥에 쓰러져있고,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보호자는 전화가 되지 않아 내게 연락을 했단다. 놀라면 허둥대기 바쁜 나였지만 그때는 예외였다. 나는 바로 가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은 뒤 재빨리 옷을 챙겨 입으며 콜택시를 불렀다. 지갑이 든 가방을 챙기고 안방에 들어가 곤히 잠든 엄마를 흔들어 깨워 상황 설명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마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옷을 입으려고 했으나, 나는 일단 집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주무시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엄마를 진정시키고 홀로 콜택시를 향해 뛰어갔다. 미지근한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쿵쿵쿵. 가슴이 미치도록 뛰었다. 새벽의 빈 도로를 달리는 택시 창 밖으로 쏜살같이 흐르는 풍경이 환상 같았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있고, 이건 기분 나쁜 꿈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내 바람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병원이 가까워져 왔다. 택시가 병원 입구 앞에서 멈췄을 때, 나는 차라리 아빠와 간병인이 자리에 버젓이 있고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진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축축한 물기가 목 뒤로 흐르는 게 기분 나빴다. 불안함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펄떡이는 게 싫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간호사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실낱같은 소망은 홀로 병실에서 피얼룩으로 더러워진 이불에 누워 꿈틀대는 동생을 봤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꼴을 보기 전 병원 입구의 유리문을 부숴버릴 듯 열어젖힐 때만 해도 나에게는 원망도 울분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의문뿐이었다. 이 시간에 대체 피가래 끓는 환자를 두고 아빠와 간병인은 어디로 간 것인가?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평안히 살 수 없는 것인가?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그러나 그 의문들은 전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침대 옆 수납장 가운데 사이좋게 놓인 두 대의 휴대전화를 보았을 때, 나는 들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미친것들. 미친것들!


 "둘 다 휴대폰도 두고 나갔어요. 일단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갈 테니까 너무 늦으면 먼저 주무세요."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끈에 묶인 동생을 바라보았다. 묶이기 전 혈관에 꽂아놓은 줄까지 뽑아댄 탓에 피로 얼룩진 이불 위에서 잠도 없이 이따금 꿈틀대는 동생을 보다 병실 창문을 보았다. 건물의 불이 거의 꺼진 채 병원 가로등만이 주차장을 메운 차를 비추는 고요한 광경을 보며 당장이라도 밖으로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산산이 부서져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영원한 평화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제 의무를 팽개친 둘이 남긴 흔적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죽음으로 이끄는 충동마저 잊을 정도로 나를 굳게 만든 건 병실 구석으로 밀린 간이침대 위에 놓인 버너 가방과 포장된 새 칼과 주방가위, 통조림 햄이었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해 수액만 며칠 째 맞고 있는 동생에게 먹이겠다고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이었다. 나는 그만 거기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상식선을 넘은 짓거리들에 완전히 질려버린 것이었다. 병원에 화기와 날붙이를 가져오고, 죽도 미음도 아닌 통조림 햄을 가져와 병실에서 구워 먹이겠다는 발상이, 정말 제정신인 사람이 할 짓이던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대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인간을 닮은 내 얼굴마저 창피할 지경이었다. 그 인간이 피붙이라는 걸 그때만큼 부정하고 싶던 적이 없었다. 나는 정말 그의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어 수치심에 몸부림치며 치욕의 시간을 보냈다.


정신적 충격에서 겨우 헤어날 때쯤 시간은 거의 새벽 세시에 가까워졌고,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일어나 복도로 나오니 인두겁을 쓴 짐승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병실 안 포장지에 싸인 식칼을 보며 온갖 잔혹한 상상을 했으나,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간병인 뒤에 숨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저열한 인간을 경멸의 눈초리로 한 번 쳐다보고 그대로 둘을 지나쳐 콜택시를 부르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내내 들끓는 증오로 사지가 떨렸지만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도로 위 택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마음에 꽉 들어찬 울분을 삭이고 또 삭힐 뿐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내린 나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집어 들었다. 주량이 바닥을 기어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수준의 나였지만,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겨 엄마 것도 하나 샀다. 안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맨 속에 술을 부어 취기를 빌어 잠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분노로 몸을 떨며 내 속을 파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길 바랐다. 머릿속에 온통 끔찍한 생각만이 달라붙어 음식물쓰레기에 기생하는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게 구역질 났다. 최대한 빨리, 무엇의 도움이라도 받아서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니 적막한 거실에 불을 켜고 앉아있는 엄마가 보였다. 어떻게 됐냐며 묻는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충혈된 두 눈에는 불안이 가득 차있었다. 나는 맥주를 건네며 엄마 옆에 앉았고,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입을 뗐다. 상황을 제대로 다시 들은 엄마는 기가 막혀 한숨만 자꾸 내쉬었다. 당분간 병원은 물론 본가에도 가지않고, 아빠도 동생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내게 엄마는 그렇게 하라고 말하며 캔을 비웠다. 먼저 주무시라고 말씀드리며, 나는 맥주가 남은 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홀로 침대에 기대 남은 걸 홀짝거리던 나는 이윽고 비어버린 캔을 아무 데나 놓고 불을 끈 채 침대에 기어들어왔다.


그날 술을 마시던 엄마의 내려앉은 시선 속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체념을 느껴, 나는 엄마가 아빠와 사는 동안 참 살고 싶지 않았겠다는 생각 하며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다음 날 영영 깨어나지를 않기를 바라며 나는 그렇게 새벽 네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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