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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청 Sep 22. 2024

느닷없는 재앙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사람


 간병인이 도망치듯 일을 그만두고 떠난 뒤로 아빠가 간병인을 구할 노력을 포기한 줄 알았는데, 아빠는 마치 묘안을 찾아낸 양 나에게 얘기를 했다. 본가인 시골에 있을 때 아빠와 아는 아주머니가 아픈 동생 먹으라고 된장죽을 끓여다 주곤 했는데, 그 아주머니가 며칠 간병을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내 머리가 갑자기 팽팽 돌아가다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이 인간 전에 만나던 아줌마는 남편 무서워 버리고 새 아줌마랑 만나는구나. 그리고 며칠 뒤 내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건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연차를 내고 동생을 간병할 준비를 마친 엄마의 차례가 끝나고 난 뒤에 간병인이 아빠와 함께 동생을 돌볼 예정이고, 그러면 나는 아빠가 동생을 돌보는 주간에는 올 일이 없어지는 것이었기에 나는 알았다고 했다. 아빠의 억지스러운 고집에 휘둘리는 것도 지쳤고, 어차피 살면서 몇 번이나 새엄마를 맞아들이는 과정에서 내 기분이나 의사는 한 번도 고려된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같은 흐름으로 나는 그저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병실에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 남편과 같이 오는 새엄마, 동생의 생모인 엄마 둘이 오간다고 남들이 쑥덕거리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


 그러다 엄마의 간병차례가 왔고 나는 엄마와 함께 동생을 돌봤다. 늘 하던 대로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온몸을 닦아주었고, 석션을 할 때 몸부림치는 동생을 잡아 누르고, 아빠가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기저귀를 수시로 확인해 갈아입히며 언제쯤 동생의 염증수치가 떨어져 나을지를 얘기하며 지냈다. 그러다 엄마가 돌아갈 날에, 나는 아침부터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아빠가 올 것 같았다. 이전에 말했듯 아빠는 가정폭력의 가해자였고 엄마는 피해자였기에 둘을 만나게 둘 수 없었다. 나는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아빠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밤에 동생의 상태를 보다 새벽에야 겨우 잠든 탓에 내 감만으로 깨울 수도 없었다. 복도에 나가있다가 아빠가 오면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을 때, 아빠는 벌써 지척에 와있었다. 내가 알면 엄마를 보낼까 봐 전화도 받지 않고 부리나케 찾아온 것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끼쳐 문을 걸어 잠그려고 했을 때, 아빠는 거의 뛰듯이 걸어와 문을 열고 내게 엄마가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직 주무시니까 들어오지 말라는 나를 몸으로 밀고 들어와 간이침대에서 잠든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잠결에 아빠를 본 엄마의 얼굴은 불쾌함과 황당함이 뒤섞여있었다. 대뜸 잠깐 얘기 좀 하자는 아빠의 말에 여기서 하라는 내 말은 가볍게 무시당했고,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내게 괜찮다고 하고 세수를 마치고 아빠를 따라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이 설마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입술을 씹고 병실 안을 빙빙 돌며 여차하면 경찰에 연락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엄마는 혼자 돌아왔고, 피곤이 켜켜이 내려앉은 얼굴로 짐을 챙겼다. 당시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물어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엄마가 전해준 얘기는 가관이었다. 아빠가 대뜸 동생이 아프고 아빠 당신의 사정이 안 좋으니 다시 합쳐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아빠의 여성 편력을 알고 있는 엄마는 당연히 거절했고, 둘은 묵은 이야기를 했다. 얘기 도중 화가 치밀면 자식에게도 쌍욕을 하던 아빠에게 애들한테 왜 욕을 하느냐고 엄마가 따지자, 아빠는 그런 적 없다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엄마는 더 이야기할 가치를 못 느껴 돌아왔고, 아빠는 계속 담배만 피웠다고 했다.


 혹시 몰라 엄마를 배웅하는 동안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니 아빠는 병실에서 성질이 잔뜩 난 얼굴로 앉아있었고,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셨느냐  물었다. 아빠는 별 얘기 안 했다며 툭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화제를 돌려 간병인은 언제 오냐 물었더니 이따 저녁에 가게 문 닫고 온다며, 이제 너도 가보라는 말에 나는 식사 잘 챙겨드시라 형식적인 말을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모자란 잠을 채우기 위해 주무시는 중이었고, 나는 짐을 내려놓고 내 방 침대에 털썩 쓰러져 천장만 바라보았다. 엄마와 아빠가 만나면 그날로 세상이 무너지고 하늘이 쪼개질 것 같았는데, 불협화음 외에 내가 상상한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내가 왜 이런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지에 대한 허탈함이 몰려왔다. 이런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더는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를 복잡한 감정에서 건져낸 건, 새벽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환자분이 복도에 쓰러져 계신데 보호자분이 전화를 안 받으세요."




*어릴 적 동생이 교통사고로 다인실에 입원했을 때, 아빠와 새엄마를 본 사람들이 며칠 뒤에 타지에서 소식을 듣고 온 엄마를 보고 쑥덕거린 일이 있었다.

**온갖 욕을 먹어서 다 쓰기도 지루한데, 일단 제일 먼저 생각나는 욕은 씨부랄년이다. 술을 먹고 방바닥에 오줌을 싸게 하지 못한다고 한 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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