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흔드는 외부요인이 없어졌으나 꾸준히 충격이 쌓인 내부가 결국 무너진 것이었다.가슴이 꽉 붙들린 듯 옥죄이는 감각에 시달리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회사에서도 증상이 찾아오자 나는 위기를 느끼고 정신과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주로하는 병원 대기공간에는 아이들과 보호자가 많았지만 내 또래로 추정되는 이들도 몇몇 보여 안심이 됐다. 나는 초진이었기에 문답지를 받아 작성을 해서 직원에게 주고, 곧 진료순서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화이트 톤의 깨끗한 진료실과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남의사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인사를 한 뒤 머뭇거리다 내 증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두서없는 말이 이어지는 내내 진중한 얼굴로 이따금 맞장구를 치면서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며 사이사이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요약하며 확인하던 의사는 불안장애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과 상상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여러 사건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가 있고 이로 품게 된 불안에서 비롯된 증상이며, 병은 의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기에 약물치료를 권했다.나는 그렇게 일주일 치 약을 받았고 다음 진료 예약을 한 뒤 병원에서 나와 약국으로 향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나는 옛 기억에 잠겼다. 사실 예전에도 정신과에 발을 들인 적이 있으나 당시 받은 약의 부작용 때문에 초저녁부터 잠이 몰려오고 아무리 자도 다음날에 하루종일 몽롱했기에 나는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있었다. 자기 전 약을 입에 까넣을 때만 해도 제발 아침에 눈 뜨는 것만 수월하기를 빌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받은 약은 다행히 같은 부작용이 없었다. 불안은 가라앉았고, 더불어 곤두서있던 신경도 누그러졌다. 가슴이 편해지니 다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숨이 트여 오래간만에 살 것 같았다.
짧은 기간 안에 유의미한 변화를 체감한 나는 긍정적인 소감을 전달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약은 한 단계 증량되었다. 나는 당시 직장인이었기에 졸리면 생활이 어렵다는 말을 했지만 그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고 받은 대로 약을 먹었다. 이번에도 걱정한 부작용은 없었고, 나는 약을 꾸준히 먹었다. 이러다보면 언젠가는 낫겠지 싶어서. 그러나 약을 먹는 기간이 길어지고 어느 정도 정신이 안정되자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의사와 상의 없이 단약을 한 것이다.
단약의 부작용은 사흘 뒤에 폭풍을 몰고 나타났다. 그저 전처럼 이따금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반동으로 더욱 증폭된 공황증세는 미친듯이 가슴을 두드렸고, 끝도 없이 솟아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몰고 와 사지가 떨리게 만들었다. 나는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펄떡이며 뛰는 가슴을 안고,이 모든 고통에서 도망치자고 유혹하는 자살 충동에 저항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내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헐레벌떡 진료 예약을 잡고 정신과로 찾아가 한 달 치 약을 처방받았다.
오랜만에 뵙는다며 인사를 한 의사는 말했다. 단약은 반드시 의사와 상의 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임의적으로 단약을 진행하는 것은 여러 부작용을 일으켜 위험하다고.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며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약을 꾸준히 먹고 안정이 되어가는 어느 날 엄마가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불만을 표했다. 마음가짐에 달린 걸 약에 의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나와 비슷하게 늘 불안감이 높았으며 불면증으로 몇 년째 앓고 있으나 정신과에 대한 편견으로 진료를 극구 거부하고 있었다. 엄마의 말로는 예전에 정신과에 가서 약을 타 먹은 적이 있는데 졸려서 하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 때문에 싫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았을 때도 그의 부정적인 태도를 접했기에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나를 끝없는 자살 충동에서 구하는 건 약이었지, 되지도 않는 비전문인의 훈수가 아니었다.
그렇게 불안에 대한 치료를 이어가던 나는 한 프로그램에서 성인 ADHD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어릴 적 조용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산만하여 자주 혼이 나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진료를 하러 왔을 때 의사에게 물었다. 성인 ADHD 검사도 진행하시냐고. 의사는 무엇 때문에 검사를 원하는지 물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나의 집중력 부족에 대한 생각과 예시를 들어 보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만히는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늘 여러 생각을 두서없이 하느라 말을 제대로 하려면 한참 무엇을 말할지 생각하고 나서야 뱉을 수 있었고, 남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잘 파악하지 못했으며, 주의력이 부족해 자잘한 실수를 잦게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말하는 증상으로 ADHD를 의심해 볼 수는 있으나 자세한 건 검사를 통해야 하고 간이 검사를 권유했다. ADHD 검진을 위한 검사 이외에 지능이나 정서검사가 포함된 종합 검사는 비싸다며. 나는 말했다.
"종합검사로 하겠습니다."
더는 이렇게 불쑥 솟아나 내 인생을 어지럽히는 잡초 같은 병들을 놔둘 수 없었다. 검사로 샅샅이 뒤져 나조차도 모르는 병의 씨앗까지 뽑아낼 각오를 한 나는 그날 바로 검사 예약을 잡고 약 50만 원의 검사비용을 결제했다. 아무렇게나 놔두었던 마음의 밭을 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