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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청 Oct 15. 2024

나아가기 위하여

한 걸음씩 내딛으며

 대형마트 안 푸드코트 키오스크 앞에서 혜를 만났다. 몰래 와서 나를 놀래키려다 들켜 실망하는 혜를 보고 그 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이 나왔다.


혜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이자, 극단적으로 좁은 내 인간관계에서 보기 드문 귀인이었다. 엉망으로 망가진 정신으로 앞뒤없이 늘어놓는 음울한 가족사를 들어주고 나를 함부로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언젠가 우울감이 극에 치달아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떨어져 죽기 직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 내게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며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비가 와서 쌀쌀한 날 따뜻한 쌀국수를 먹으며 우리는 간단히 몇 마디를 주고 받다 그릇을 비우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우리의 대화주제는 나의 매물 평가였다. 나는 당일 본 매물에 대해 죽 감상을 늘어놓으며 후보군을 보여주다, 문득 급한 독립에 이르게 된 계기에 대해 말을 하게 됐다. 계기는 당연히 가족이었고, 나를 이토록 몰아붙인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에 껄끄럽고 부끄러웠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아동성범죄 피해자였다. 그걸 침묵하고 있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가족한테 말을 했고, 아빠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내 고백 후 몇 년뒤에 내 성범죄 피해를 가지고 나를 조롱하는 막말을 던졌고, 내가 울자 죽여버리겠다고 부엌에 가서 칼 가져오라며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언니는 내게 빨리 잘못했다고 빌라고 했고 아빠는 자기도 힘들다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소리를 높이다 자리를 떠버렸다. 이 때의 기억은 너무나 끔찍해서 차마 내게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털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혜에게 고백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혜는 오랫동안 침묵했고 나는 그런 혜를 보지 않고 카페 바깥 풍경만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혜가 나를 어떻게 볼 지 두려웠다. 내 잘못이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무서웠다. 피해자로서의 발화가 겁이 났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이 때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부끄러웠어, 이 얘기를 하기가.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하지만 이제는 털어놓고 싶었어. 내 안에서 털어버리려고."


 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마음을 헤어려주는 말을 했다. 아쉽게도 나오려는 눈물을 참느라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혜답게 진중하고 사려깊은 말들이었다. 혜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나는 그 애에게 털어놓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제는 돌고 돌아 다시 나의 독립과 매물 얘기로 돌아왔는데, 본 것 중에 입지도 좋고 아파트라서 괜찮았지만 주변 동일 평수 시세에 비해 저렴한 보증금이라 의심을 품어 차순위로 밀어놨던 매물을 혜에게 보여주었다. 혜는 내가 알아본 정보를 듣다 얘기했다. 결정은 나중에 해도 되니 연락이나 해보라고. 나는 긴가민가하던 참에 한 번 연락을 해보았고, 중개인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이미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 당일 방문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말로 방문 예약을 잡고 혜와 수다를 떠는데 갑자기 아까 통화한 중개인이 전화를 걸어 얘기했다. 지금 사시는 분이 시간이 되어서 당일 저녁에 방문이 가능하다고. 시간은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나는 혜를 보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30분 뒤에 가겠습니다.”


 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급하게 테이블을 정리하고 나와 지도를 보았고 버스로 가기도 애매한 위치라 걷기로 했다. 비가 그친 하늘에는 석양의 따뜻한 빛이 차있었다. 그 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싸늘해진 바람에 눈이 시려서인지, 걷는동안 자꾸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삶의 톱니바퀴가 끼걱거리며 돌아가는 기분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당시 곁에 있던 혜에게는 보이지 않게 눈물을 훔치며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점점 아파트 단지가 가까워져 오고, 해가 지기 시작했다. 가로수길에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들이 이따금 물을 털어내는 바람에 혜가 핀 우산 아래서 같이 걸었다. 어두워지는 거리에서 조용히 걷고 있자니 감정은 천천히 가라앉고 나는 이번 매물이 어떻게 되건 이 짧은 시간을 잊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착한 우리는 중개사와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매물을 보았다. 가구 뒤쪽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보이는 곳의 도배와 장판은 찍힘이나 곰팡이, 결로흔적 없이 깔끔했다. 보일러도 노후되지 않았고, 옵션으로 제공되는 가전도 멀쩡했다. 베란다 밖 풍경은 학교와 다른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평범한 광경이었고, 뒤쪽 창문으로는 산책로가 보였다. 다른 매물을 볼 때처럼 하나씩 체크를 하는데, 특별히 걸리는 점이 없었다. 당시 살고 있던 세입자는 일 때문에 2년 계약을 채웠다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나가는 것이고, 짐을 줄이고 싶으니 원하는 가구가 있으면 주겠다는 말을 했다. 주겠다는 가구 상태는 무난했지만 성급히 결정하지는 않고, 계약을 하면 말씀드리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보증금으로 이만한 매물은 얻기 힘들었다. 주변의 다른 매물들은 이미 이곳 보증금의 2~3배에 달하는 보증금과 별 차이나지 않는 월세를 내세우고 있었기에 여유자금이 없고 벌이가 적은 내게는 진입 자체가 불가했고, 당시 머물던 호텔에서 새벽내내 눈을 혹사시켜가며 정리한 리스트 중에서 이건 당당히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매물이었다. 등기부등본이 깨끗하다면 가계약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중개사에게 가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중개사는 집주인과 통화가 되는 대로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세입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와 중개사와 헤어졌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는 중개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금방 불이 붙었다. 하필 이틀 뒤에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자취 경험이 있던 혜는 이미 나와 같이 매물을 둘러보면서 점수를 매겨놓았는지 가계약을 해도 될 지 묻는 내게 해도 되겠다고 바로 얘기해주었다. 곧 문자로 등기부등본이 왔고,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보증금은 엄마가 대주기로 했음으로 나는 엄마에게 상황을 정리해 카톡을 보냈다. 엄마는 등기부등본을 보았지만 당신이 보지 못한 매물이라는 점을 찜찜해하면서도 일단 가계약금을 넣어주었고, 나는 바로 중개사를 보챘다. 곧 계좌번호가 왔고 나는 재빠르게 입금 후 입금사실을 알렸다. 엄마가 일하는 도중이라 돈이 오지 않자 자기가 돈을 빌려주겠다고까지 했던 혜와 나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얘기를 나누며 버스를 타기 위해 돌아갔다. 비가 그친 뒤라 조금 쌀쌀했지만 나는 마음이 들떠 추운 줄도 모르고 혜와 가을의 밤거리를 걸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잘 풀리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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