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과 공인중개사에서 공휴일에 만나 월세 계약을 마쳤다. 중간에 옵션 설명을 잘못 받아 마찰이 생길 뻔 했지만, 중개사의 오해라는 싱거운 마무리와 함께 받은 월급을 따로 빼 남겨두고 이삿짐 업체를 수소문해 예약까지 마치며 짐을 싸서 들어가는 날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이사비용이나 짐을 싸는 것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연을 끊은 가족과 몸이 떨어져있어도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아니었고, 전입신고 후 등본을 통해 그들이 찾아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줄곧 나는 정서적 폭력을 지속적으로 받은 상태였지만 눈에 띄는 신체적 폭력을 겪거나 언어적 폭력에 대한 녹취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등초본교부제한 신청을 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그러다 행정복지센터에 근무경험이 있는 지인이 가정폭력 전문 상담소에서 직인이 찍힌 상담사실 확인서를 교부 받으면 신청이 가능하다는 말을 해주어 대표적인 상담소를 찾다 여성의 전화 지역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급한 일은 아니고 문의할 게 있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쭉 정서적으로 가정폭력을 당해왔는데, 경찰 출동 이력이나 증거가 없어도 상담이 가능한가요?"
상담사분은 말씀하셨다. "네, 가능합니다. 본인이 가정폭력이라고 느끼시는 거 잖아요?"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담 신청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협박 같은 위협이 있었고, 곧 이사를 가는데 그곳의 위치가 가해자인 가족에게 노출되는 걸 원치 않기에 등초본교부제한 신청을 걸고 싶어 상담을 원한다고. 상담사분은 대면상담을 권하시며 가능한 시간을 물어봐주셨고, 나는 당장 나갈 수 있기에 당일도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당일 오후에 시간이 되었고, 나는 예약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등초본교부제한을 언급한 것 때문에 상담사분이 물어보셨다. 가해자가 정확히 누구냐고. "부모, 형제……. 다요." 가족 전부 제한을 걸 수 있을지는 당장 확인이 어려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행정복지센터에 문의해보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통화를 마쳤다.
나는 전화를 마치고 서서 상담사분의 말씀을 곱씹었다. '본인이 가정폭력이라고 느끼는 거 잖아요?' 가족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던 기준을, 상담사분은 너무나 당연하게 말씀하셔서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나는 침묵하고 있다가 아직 상담까지는 시간이 남아 복잡한 가슴을 안은 채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웠다. 분리수거장에 버릴 쓰레기 봉투를 묶으며 나는 과연 상담이 정상적으로 진행이 될 지 염려했다. 상담사분은 가능하다고 했지만, 내게는 아무 증거도 없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는 협박 문자를 모두 지우고 그들의 번호를 다 차단했기 때문에 아무 기록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한두 개 정도의 기록이 남아있겠지만, 내가 교부제한을 걸고 싶은 대상에 엄마도 있었고 엄마는 상담의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협조를 받을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상담센터 방문에 대한 것도 비밀로 했었다. 그 때의 나에게는 엄마의 짜증과 힐난을 받아낼 여력이 없었다. 엄마를 해치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든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다.
집에 있어봐야 머리만 복잡해지는 것 같아 나는 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방에 챙겨 아까 묶은 쓰레기 봉투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뒤라 싸늘하고 머리가 흩날릴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탔다. 몇 정거장 쯤 갔을까, 지체장애가 있어보이는 성인 조카를 데리고 탄 이모가 있었다. 그 이모는 조카가 딱히 문제될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호통을 치고 화를 내고 앞에 앉은 내 좌석을 발로 쳤고, 종국에는 버스에서 참지 못하고 변을 본 조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나는 동생에게 화를 내던 아빠가 떠올라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버스에서 내려 찬 바람을 맞으며 심호흡을 하고 걸었다. 목적지는 센터 인근의 카페였다.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을 축이고 편안한 곳에서 쉬고 싶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침 이후 쭉 공복이었기에 오후 2시가 넘은 그 때에 나는 배가 고팠지만 지갑에 여유가 없었기에 커피 하나만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태블릿을 꺼내서 한창 글을 쓰는데, 아침에 지인과의 약속이 있어 나갔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며 묻는 엄마에게 나는 대충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일이 끝나기 전에 별로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엄마와 아무런 소통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매장에서 틀어놓은 잔잔한 음악과 함께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곧 상담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남은 커피를 들이키고 바깥을 나서니 싸늘한 바람에 머리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건물사이를 가로질러 쭉 걸으니 곧 센터가 보였다. 나는 정문으로 향해 도어락으로 닫힌 문을 보고 초인종을 눌러 용건을 설명했다. 도어락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향하니 1366 사무실이 보였다.
주말이라 근무하는 사람은 둘이 끝인듯 했다. 한 분은 내게 마실 것을 물었고, 나는 물을 요청 드리며 다른 분이 건넨 서류를 작성했다. 가족관계를 적는 동안 이상하게 손이 벌벌 떨렸다. 과도한 긴장탓인지 나는 가족들의 생년월일을 알고 있음에도 나이를 엉망으로 적고 상담 신청 사유를 쓰는데도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상담사분은 차분히 기다렸다가 서류를 검토하고는 상담실로 나를 안내했다.
상담은 간결했다. 내가 폭력이라고 느꼈던 일에 대해 말하고, 현재는 가족과 분리되어있어도 전입신고 후 등초본을 열람해 나를 찾아오는 것이 두려운 것을 전했다. 이를 토대로 작성되는 상담사실 확인서는 보통 발급되는데 사흘정도 걸리나, 화요일이면 발급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며 방문 전 연락을 달라고 하시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센터에서 나왔다. 여전히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이 끼어 어두운 날씨를 보고 느끼며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