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코로나 시국에 코로나 지정병원이었다.
밖을 오갈 수 있었던 간병인들과 보호자들은 병원을 드나들 때마다 꼭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불편함이 컸다. 그래서 간혹 검사 없이 몰래 다녀오는 분들도 있었고, 그렇게 병실 안에도 알음알음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했다.
다인실의 경우 확진자가 발생하면, 그 환자는 1인실로 격리되고, 같은 방을 쓰던 접촉자들도 해당 병실에 함께 격리되었다.
나 역시 그런 상황에 휘말렸다. 방에 잠시 머물렀던 환자와 간병인 이모님이 코로나에 걸려 있었고, 그분들이 예쁘다며 준 자두 한 알을 받아먹었다가 결국 감염되고 말았다.
생리 전 증후군 때문에 원래도 열이 있던 나는, 처음엔 코로나가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열이 나자마자 빠르게 격리되었고, 검사 결과는 확진이었다.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엔 “한 번 걸려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막상 환자 신분으로 걸리고 나니 그건 결코 쉴 틈 없는 불안과 고통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검사를 받으러 이동할 때는 괴물 영화에서나 보던 비닐 캡슐 안에 누워 옮겨졌다. 신기함 30%, 무서움 70%. 어딘가로 끌려가는 느낌이었고, 내가 실험체가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막 시작한 재활 치료가 격리로 인해 일주일이나 중단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치료사분은 “치사하게 혼자 걸렸네~” 하고 웃으셨고, 나는 “아이 참, 누가 직장인 아니랄까 봐요” 하고 핀잔을 던졌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한 환자에게 그 일주일의 공백은 막막하고 불안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격리 중에는 목이 너무 아파서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일주일 내내 겨우겨우 먹은 건 죽 한 숟갈이 전부였다.
밤에는 배가 고파도, 낮에 음식을 받으면 입덧처럼 속이 울렁거려 손도 대지 못했다. 결국 몸속 칼륨 수치가 급격히 낮아져,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했다.
칼륨 보충 약은 겉모습은 오렌지맛 사탕처럼 생겨 기대했지만, 죽조차 삼키기 힘든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상대였다. 결국 링거로 맞게 되었고,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갔다.
격리된 1인실은 창문조차 열 수 없었고, 보호자와 단둘이 갇혀 지냈다. 우리는 그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옛날 드라마 ‘광개토대왕’ 재방송을 정주행 하며 버텼다.
코로나가 나아 격리가 해제되었을 땐, 원래 있던 624호실로는 가지 못하고 임시로 618호 3인실에 배정되었다. 낯선 병실, 낯선 가족들과 함께하는 좁은 공간은 보호자와 나 모두에게 또 다른 고역이었다.
심각했던 칼륨 수치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의료진의 집중 관리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에서 원래 병실 가족 중 한 명을 화장실 가는 길에 마주쳤을 때 그 반가움은 마치 이산가족 상봉 같았다.
병실 자체의 격리가 해제되고 다시 원래 방으로 돌아갔을 때, 왕할머니는 내가 사라진 것을 보고 다른 집으로 이사 간 줄 아셨다고 한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하며 계속 말씀하셨다고.
할머니… 막내 왔어요.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요. 이제 어디 안 갈게요. 우리 집으로 가요.
그렇게 2주간의 이별 끝에 우리는 더욱 애틋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