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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Oct 22. 2024

, 타는 냄새. 어떤 물체가 허공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을 알리는 냄새, 회색 연기와 검은 울음의 아지랑이.

어떤 것이 타고 있느냐에 따라, 어느정도 탔는지에 따라 냄새가 아주 다르다. 빵이나 누룽지 같이 적당히 탄 탄수화물의 냄새는 기분좋게 식욕을 자극하고, 땔깜이 타는 냄새는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대부분은 매캐한 냄새가 숨 쉬기 힘들게 하는데 나는 그게 꼭 그 물체의 마지막 몸부림같다고 느껴졌다.

오래 전 밤 바다를 떠올린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차고 파도가 넘쳤다. 이왕 바다에 온 거 발이라도 담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가을의 밤바다는 어둡고 사람이 없었다. 검은 형태들 사이로 세찬 파도의 소리와 비릿한 바다냄새만이 가득했다. 저 멀리 사람들의 기척이 있었다. 작은 불꽃 두개가 허공에 글씨를 그렸다. 그렇게 좋을까, 나만 혼자인가, 질 수 없다. 나는 가방 속에서 사진뭉치와 라이터를 꺼냈다.

너와 헤어지자마자 너와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버렸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처럼, 어떤 과거와 사연도 없는 물건인 것 처럼, 미련없이 50리터 쓰레기봉투에 켜켜히 쌓았다. 시집을 찢어버렸다. 나는 너와 종종 같이 책을 읽었다. 내가 왼편을 잡고 있으면 너는 오른편을 잡았다. 너보다 읽는 속도가 빠른 나는 먼저 페이지를 다 읽고 기다렸다. 네가 다 읽으면 네가 쥐고있던 오른쪽 페이지를 내쪽으로 넘겨주었다. 그러길 반복했다. 같은 책을 읽으면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졌지만, 우리가 우리만의 시공간에 온전히 존재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부분이 좋다며 표시해놓은 구절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 페이지를 찢었다. 그렇게 한장씩 모든 페이지를 찢었다. 버려야 할 페이지가 무수히 많았다.

휴대폰에서 너의 번호와 메시지를 지웠다. 너의 사진도 휴지통에 옮겨졌고, 휴지통을 비웠다. 언젠가 나몰래 숨겨놓은 담배 반갑과 라이터, 너의 집에서 들고온 반찬통 두개, 실온에 두라고 잔소리 하던 너의 사랑 초코바 세개, 아끼던 파랑색 캡모자와 덜아끼던 초록색 모자, 써준 편지 여섯 통, 아직 덜 마른 꽃 한송이, 집에서만 입는 검은색 티셔츠 두개. 이년 칠개월의 시간이 50리터 쓰레기봉투에 담겼다.

그러다 발견된 너의 사진이 문제였다. 그래, 저렇게 천진하게 웃는 사람이었지, 미울정도로. 찢어서 같이 버릴까, 그러자 찢겨진 너의 눈, 코, 입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걸 상상하곤 그만두었다. 사진 속 너의 얼굴은 여전했으니까. 그래서 진부하게 태워버리기로 했다. 지난 여름에 함께 온 이 바다에서. 같이 누워 같은 노래를 들었던 이 곳에서. 다음에 또 오자고 약속했던 이 바다에서.

분명 와본 적 있는 이 바다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빨리 태워버리고 가자. 왼 손에 너의 사진을 쥐고, 오른 손에는 네가 숨겨 놓았던 너의 라이터를 들었다. 불을 켜고 사진에 가까이 대자 너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너의 웃음, 너의 입술, 우리의 시작과 끝이 모두 그 입에서 비롯되었지. 그 입술에서 나오던 예쁘고 빛났던 말 한마디에 빠져버렸고, 모든 걸 이해해줄 것 같은 말에 온 마음을 기대버렸다. 우리의 대화는 오직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만의 언어로 가득했다. 네가 살며시 입을 맞출 때면 그 눈을 감는 찰나에 다른 세계로 다녀온 착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구축한 세계로. 그 세계는 너의 입에서 나온 사소한 거짓말로 부서졌다. 그 거짓말이 나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세계를 점령했다. 나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 모른 척 하고 싶었을까.

라이터 불빛으로 사진속의 너를 한참 바라봤다. 우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되뇌었다. 천천히,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사진 한장마다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한장 한장 타오르면서 너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그을음의 지독한 냄새에 눈이 시렸다. 그 핑계로 내내 울었다. 비로소 흰 재가 되어 사라졌을 때, 모든 세계가 태워진 그 자리에 내가 혼자였을 때, 더는 슬프지도 파도가 무섭지도 않았다.

나는 모래사장에 홀로 누워 별을 바라봤다. 선명한 별빛들이 하나 둘 많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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