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무겁고 진득한 공업기름의 냄새. 자동차에겐 일용한 양식의 냄새, 인간에게는 그 반대일지도. 간혹 주유소의 휘발유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벤젠이라는 물질 때문이며 일부 달콤(?)한 향을 느낀다고. 세상에는 참 특이한 사람들이 많아.(라고 파마약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씀)
나는 운전을 못한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나는 운전이 무섭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면허를 따고 운전해 보면 또 달라.’라는 말을 십 년째 듣고도 운전면허를 따겠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어느 정도 나면,
1. 조수석에 앉아서도 옆차가 다가오면 쫄아서 움찔거린다. 2. 습관적으로 보조석 손잡이를 움켜잡고 운전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3. 자전거도 안 탄다.(못 탄다) 4. 범퍼카도 안 탄다.(T익스프레스는 좋아한다) 5. 악몽으로 운전하는 꿈을 꾼다.(꿈에서도 시동키는 법을 모르는데 운전석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무섭다)
같이 여행을 가게 되거나 차를 얻어 타게 되는 경우, 운전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의 철칙이 있다.
1. 여행일정이나 경로, 동선에 토를 달지 않는다.(내가 가고 싶은 곳에 연연하지 않는다.) 2. 운전자의 입에 맛있는 걸 자주 넣어준다. 3. 운전자의 눈이 감기지 않는지 ‘몰래’ 확인한다. 4. 주유비와 운전에 따른 수고비로 여행경비를 더 댄다. 5. 그 외에 상황에서 운전자의 눈치를 살핀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대부분 ‘그럼 면허를 따’라고 한다. 언제까지 따지 않을 거냐고. 마치 미혼에게 결혼을 독촉하듯이, 부부에게 아이를 독촉하듯이. 그런다고 쉽사리 운전이라는 게 마음이 먹어지는 게 아닌데. 아니, 한 번도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다 보니 운전을 하는 사람은 어른처럼 보였다. 주변사람이 하나둘씩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는 걸 보면서 나만 성인이 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침내 운.알.못(운전을 알지 못하는) 멤버 중 마지막 남은 후배 하나가 운전면허를 땄다고 했을 때, 나는 “너도 드디어 어른이 되는구나.” 라며 경의를 표했다. 마치 나는 건널 수 없는 강 너머의 후배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주유소란 아주 특별한 장소가 된다. 면허도 없고 차도 없는 사람은 갈 일이 없는 곳이라, 내가 주유소에 갔다는 건 누군가 나를 보조석에 탑승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뜻이다. 내가 운전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주유 좀 해야겠다.” 하는 순간 몰래 숨어서 미소를 짓곤 했다.
내가 너의 차를 타고 가던 도중, 너는 주유를 해야겠다며 셀프주차장으로 향했고, 나에게 물었다.
- 주유해볼래?
- 내가?
- 해보고 싶을 것 같은데?
- 맞아!!!!!!
너는 내 손에 비닐장갑을 끼워준 후 주유구를 열었고, 내 손에 노란색 주유기를 쥐어주었다. 어린아이의 손에 장난감 총을 쥐어주듯이. 그때의 기름 냄새, 꿀렁거리던 주유관, 묵직하고 단단한 주유기의 촉감 따위가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첫 도전이자 탐험이었으니까.
주유를 마치고 너는 나에게 영수증 종이를 보여주었다.
- 이게 뭐야?
- 세차장 할인쿠폰. 세차도 하고 갈까?
- 좋아!!!!!!
어둡고 좁은 기계식 세차장으로 너의 차가 드르륵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너의 손을 잡고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온갖 솔과 액체와 세제가 난무하고 앞도 옆도 보이지 않고 현란하다.
- 뭔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기분이야
- 새로운 세상으로 가자, 우리.
- 출발!!!!!!
이 유치하고, 실없는 모험은 5분도 안되어서 끝이 났지만, 어쩐지 자동차뿐만 아니라 내 마음까지 씻긴 기분이었다. 그걸 눈치챈 너는 내가 타는 날을 기다렸다가 주유를 하거나 세차를 했다. 덕분에 나는 종종 짧은 모험을 떠나곤 했다. 나는 여전히 면허가 없고, 운전을 못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것도 많고 두려운 게 많은 삼십 대이지만, 너라면, 너의 다정이라면 너의 손을 잡고 어디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