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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Oct 29. 2024

가지

가지. 가지나물무침 말고 그냥 가지. 너의 냄새는 무엇이니?

가지와의 첫 만남은 무려 이십여 년 전, 초등학교 급식시간이었다. 거무죽죽하고 축 늘어진 가지의 모습은 딱 봐도 맛이 없을 것 같았다. 가지의 맛이나 향보다는, 그 물컹하고 흐물거리는 식감이 별로였던 것을 기억한다. 맛없는 급식으로 처음 만난 음식은 어른이 되고도 좋아지질 않는다. 나에게는 고추장만 풀어놓은 것 같던 고추장찌개와 딱딱했던 코다리조림이 그렇다. 가지는 그렇게 나와는 친해질 수 없는 채소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왔다.


-      앞 집에 가서 가지 좀 따와.

십 년 전, 할머니 집에 놀러 간 날 밤 할머니의 심부름이었다. 앞집 할머니가 가지 좀 따가라고 했다며 나를 재촉했다. 늦은 밤, 남의 텃밭에 들어가 가지를 찾아 헤맸다. 커다란 잎들 사이로 손바닥만 한 가지 세 개가 열려있었다. 잎과 줄기의 잔털들 때문에 손등이 따가웠다. 그렇게 얻은 가지 세알. 광택이 도는 보랓빛에 탱글하고 매끄러운 감촉. 탱탱볼 같기도 하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모형 같기도 했다. 한참을 손에 쥐어보았다. 너 참 귀엽잖아? 어쩌다 이 탱글거리는 게 흐물 하게 변하는 걸까.

작년, 자주 찾는 딤섬집에서 처음으로 가지딤섬을 시켜보았다. 갓 튀겨져 나온 가지딤섬을 한 입 베어 문 순간, 충격에 휩싸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못해 육즙처럼 터져 나오는 채즙, 순간적으로 녹아버리는 가지의 하얀 속살... 이게 지금껏 내가 알던 가지라고? 한 접시를 더 시킬까 하다 참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가지딤섬 생각이 가득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지금까지의 (가지)세계가 무너진 기분이랄까.

올해 주말농장으로 텃밭을 일구면서 가지를 키우기로 결심한 건 가지딤섬 때문이었다. 초보농사꾼이 작물을 키우기 전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바로 유튜브보기다. 수많은 선배농부의 가지 잘 키우는 법을 익혔다. 잘 키우면 모종 하나에서 가지가 백개도 넘게 열린다는 말을 듣고는 가지방석에 앉은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심어놓은지 2주째 되던 날, 고추나 방울토마토 등 쑥쑥 커가는 다른 작물들과 다르게 가지는 크기도 크지 않고 몇 개 되지 않은 잎들도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같은 흙에 같은 물을 주고 같은 해를 보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초보농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마음만 졸였다. 맞은편 텃밭의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뽑아버리고 새로 심는 게 낫겠다고, 지금 다시 심어야 늦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고민하다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저 작고 연약한 아이를 뽑아버리는 게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튜브로 가지 키우는 법을 다시 검색해 보고, 가지 꽃봉오리에 핀 진딧물을 손으로 잡아준 후, 비료를 주었다. 

그렇게 돌봐주기를 한 달, 다른 작물들보다 키는 작았지만 제법 튼튼해졌다. 가지와 꼭 닮은 진한 보랏빛 잎들과 그보다 연한 보라색의 꽃이 피었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조그맣게 가지의 열매가 자랐다. 그렇게 첫 가지를 수확했다. 나의 작고 통통한 가지 세알, 기특하다. 그 기특함은 작은 나무에서 열매를 맺은 가지이기도, 동시에 이 작은 가지나무를 열심히 키워낸 나이기도했다. 뽀득거리는 겉면과 탱글 말랑한 촉감, 이거다. 내가 예전에 느꼈던 그것. 

첫 수확한 가지 세 개로 해 먹을 요리는 당연히 가지딤섬이었다. 이번에도 유튜브 셰프님들의 레시피를 전수받았다. 새우살과 집에 있는 야채들을 다지고 계란을 넣어 소를 만들어 놓는다. 소금과 후추로 간하고, 고소한 향을 위해 건새우가루도 추가한다. 가지는 3-4cm 크기로 어슷 썰고 중간에 칼집을 크게 넣어 오리주둥이처럼 벌어지게 만든 후 소금을 뿌려놓는다.  그러면 가지 살에 송골송골 물이 맺히는데 키친타월로 제거한 후 전분을 고루 묻힌다. 가지 틈을 잘 벌려 소를 넣고 전분을 묻힌다. 낮은 온도에서 튀겨내면 완성이다.

직접 키워낸 가지로 만든 가지딤섬은 정말 맛있었다. 파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 세 알에 8천 원에 파는 가지딤섬을 집에서 배불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가지의 냄새였다. 갓 수확한 가지를 도마에 놓고 먼저 꼭지 부분을 들춰서 뜯어낸다. 신기하게 초록빛이었다. 그 후 가지를 칼로 써는 순간, 풋사과 같은 가지의 향이 났다. 사과색깔, 사과 냄새나는 가지라니.

가지는 초록으로 태어나 햇빛을 보면서 보라색으로 변하는 거라고 한다. 꽃이 진 자리에 빼꼼히 내민 손톱만 한 가지열매를 보면 초록빛이다. 이후에 나는 가지 하면 보라색보단 초록색을 먼저 떠올린다. 마트에서 초록색 사과를 보면 자연스럽게 가지를 생각한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게 많고, 유튜브에는 선생님이 많고, 주렁주렁 가지는 오늘도 열린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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