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다는 거짓말
「오후와 나」
오후와 함께 희미해졌어요 내가
조금씩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태양도 함께
다른 시간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함께
너를 희미하게 하려 했는데요 그러다가 오후 속으로 들어가 희미해졌어요 내가
너는 간절히 믿었겠죠 내가 없다고
나는 투명해졌어요 비로소 오후와 함께
의자에 얹힌 엉덩이와 의자가
의자의 다리와 나의 다리가
나의 얼굴과 그 옆이 뭉개집니다
너는 오후를 통과합니다 네가
오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통과합니다
나는 팔을 뻗어
너의 몸속 그늘진 내장에 손을 댑니다
너의 불투명한 몸이
더 투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네가 도시 끝을 향해 떠납니다 네가 멀어지면서 하얀 그물처럼 투명해질 때
물고기처럼 나는
천천히 오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느끼는
불투명한 덩어리로 돌아왔습니다
네가 투명해지는 몸을 못 견디고 돌아왔을 때
오후도 나도 끝났어요
어느 세계로 가까이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너는 다시 떠났어요
갑자기 오후가 끝났으므로
나는 너를 쉽게 잊었어요
이성미 『칠 일이 지나고 오늘』# 016-017
오후, 태양이 기울어지며 사물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시간.
그 속에서 너 역시 점점 멀어지며 투명해진다.
이별은 보통 슬프다. 그런데 이 시의 이별은 조금 다르다.
너의 떠남은 나의 부재를 ‘간절히’ 바라고 믿을 만큼 진저리 치듯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남겨진 나는 어둠이 오면 사라지게 될 늘어진 그림자 같은 오후에 갇혀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있다.
시간(상징적인 오후)과 사물(의자), 그리고 나의 물리적 경계를 잃을 만큼, 화자의 정신은 뭉개지며 자아의 해체로 이어진다.
화자는 ‘너의 몸속 그늘진 내장에 손을 댐’으로써 상실에 대한 무력한 통과를 이룬다.
그렇게 천천히 너를 보내는 오후의 시간이 흐르고, 너를 완전히 투명하게 만든 뒤에야 나는 ‘태양과 바람을 느끼는’ 하나의 실체로 돌아온다.
그런데 반전은, 떠난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나의 오후가 끝나 있었고, 받아들여지지 못한 너는 ‘어느 세계로 가까이 갈지’ 결정하지 못한 채 다시 떠났다는 것이다.
시의 서술을 따라가면 화자는 이별의 시간과 감정을 정리한 듯 보인다.
‘갑자기 오후가 끝났으므로 / 나는 너를 쉽게 잊었어요’
하지만 내가 이 시에서 본 것은 ‘나는 너를 쉽게 잊었어요’라는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