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를 쓴 고 김진영 작가님의 번역서인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었다. 암선고를 받고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면서 쓴 '아침의 피아노'와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는 같은 듯 다르다.
'아침의 피아노'에서 저자는 점점 쇠약해져가는 육체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정신력으로 견디며 일상을 살아내려는 자기 자신을 오롯이 느끼며 짧은 메모형식의 일기를 쓴다. 그런데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는 어머니의 죽음이후 겪는 정신적 고통, 슬픔, 우울, 무기력,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느끼는 일상의 평안마저도 불안으로 덮어버리던 2년여 동안,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글쓰기를 통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지난 2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의 최고수준을 온몸으로 겪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직접 당하는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저자는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했다. 나도 한동안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봤다. 산책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람들,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 뭐가 그리 좋은지 몸까지 비틀거리며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결코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죽음이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몇 달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일 일어날 일 조차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무슨 중장기 계획을 세운단 말인지. 계획을 세우는 일, 사람을 만나는 일, 모두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러다 저자의 말처럼, 시간이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을 차츰 사라지게 한 탓인지, 일상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는 '슬픔' 보다는 '그리움'에 가까워진 감정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 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본문 78p
아빠가 돌아가신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마치,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잘 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보신다면 아빠가 서운하실까? 내가 죽은 후에 남은 가족들이, 지금의 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평범한 일상을 잘 살고 있다면 어떨까? 솔직히 조금은 서운할 거 같다. '나'라는 존재를 너무 빨리 잊는 거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난 아빠를 잊은 것이 아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빠져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살지 않는 것일 뿐, 일상 중에 아빠를 종종 생각한다. 맑은 하늘을 보면서,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시는 어르신을 보면서, 아빠가 좋아하시던 나무와 꽃을 보면서, 아빠가 쓰신 짧은 글을 보면서.
그러니 일상을 잘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남겨진 자에게 고인이 주신 선물인 것이다. 아빠는 나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고,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선물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전혀 서운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ㅎㅎㅎ
우리 엄마는 아빠가 계시지 않는 외로운 밤을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다행히도 엄마는 나보다 강한 정신을 가지고 계시다. 엄마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주저없이 하기를 바라고, 천국에 가시는 그날까지 몸도, 마음도, 정신도 건강한 삶을 유지하지면서 재미나게 사셨으면 좋겠다.
지금은 나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가지고 싶은 것도 생겼다. 다시 한 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고 김진영 작가님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셨던 하루하루의 무게를 생각하며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