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씅쭌모 Sep 24. 2024

속 깊은 20대 아들이 엄마랑 대화한대요(2)

할머니에 대한 추억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었다. 전에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명깊게 읽었던터라 저자의 에세이도 읽어보고 싶었다. 작가의 할머니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 소설 속 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분이었다. 소설 속 할머니는 거칠고 억세며 4대 독자 손주에게, 그리고 며느리에게 막말을 퍼붓는 온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이지만 저자의 할머니는 따뜻하시고 온순하신 분이다.

  나의 큰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외할머니 손에서 오랫동안 컸는데 구체적인 기억은 없어도 할머니에 대해 어떤 추억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라는 에세이를 읽었어. 저자의 할머니를 통해 엄마는, 그동안 훈육이라고 생각하며 너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떠올랐어. 부끄러운 기억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게 최선이었을거야' 생각하며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의 친할머니를 생각했어. 엄마가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같이 살았으니까 햇수로는 15년을 함께 산거야.

  할머니는 모든 것을 아껴 사용하셨어. 눈에 보이는 재화는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엄마는 할머니가 밤에 주무실때를 제외하고는 누워계시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할 게 없으실 때는 앉아서 성경책을 읽으셨지. 마치 불경을 읽는 것 같은 톤과 리듬으로.

  어느 날은 빳빳한 달력을 잘게 오려서 창세기, 출애굽기 등의 구약과 신약책 이름을 쓰고 성경책에 밥풀로 인덱스라벨 처럼 붙이고 계시는거야. 그 모습이 황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한참을 크게 웃었어.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붙지 않은 라벨이 쉽게 떼어졌기 때문에 엄마는 시중에서 산, 성경 색인 라벨지를 예쁘게 붙여드렸어.

  가만히 있는 시간조차 아까워하시며 전단지라도 손에 쥐고 읽으셨고, 버스비 500원 정도 아끼시려고 먼 거리를 걸어다니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가 함부로 쓴 돈 때문에 죄책감도 느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할머니가 좋았어. 그리고 존경했어. 엄마는 할머니께 자주 말씀드렸어. "할머니는 요즘에 태어나서 공부했다면 서울대 충분히 갔을거야."라고.

  너는 외할머니나 친할머니와 있었던 기억나는 에피소드 있니?




  저는 외할머니와 아주 비밀스러운 추억이 하나 있어요.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라서 말씀드릴게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 하교하고 집으로 가는 중에 참기 힘들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는데, 다행히 잘 참고 우리 아파트 동까지 왔어요.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아서 벤치에 앉아서 손으로 허벅지를 문질러 가며 고통을 참고 있었어요. 1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일어나서 빨리 타려고하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그냥 올라가는거예요. 갑자기 힘이 주욱 빠지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싸버렸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참았는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시 내려올때까지 1층 복도에도 싸고 엘리베이터 안에도 싸고 우리집 복도까지 싸면서 집으로 들어갔어요.

  할머니께서 완전히 물에 빠진 듯한 제 바지를 보면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으시고 귀엽다고 말씀하시면서 걸레를 집어들어 1층부터 엘리베이터 안, 그리고 우리 집 복도까지 다 닦으셨어요. 그때 감사하면서도 죄송했는데 한편으로는 엄마한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크게 화를 낼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리고 친할머니께는 음식과 관련해서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제가 순두부를 아주 좋아하잖아요? 한 번은 친할머니 댁에 갔는데 하얀 순두부에 간장양념을 넣은 순두부탕을 해주셨어요. 주신 걸 다 먹고도 더 먹었을 정도로 맛있었어요. 할머니께서 기분 좋으셨는지 그 후로 제가 갈 때마다 야식으로 간장 양념을 넣은 순두부탕을 항상 준비해주셨어요.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고 가끔씩 맑은 순두부탕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해요.




  외할머니와 그런 엄청난 에피소드가 있는 줄 몰랐네. 할머니가 엄마한테 얘기 안했거든. 너처럼 깔끔하고 단정한 아이가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겠다. 정말 할머니가 보셔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

  대부분의 할머니는 손주한테 관대하고 너그러우신거 같아. 그런 상황에서 귀엽다는 말을 하시는 걸 보면. 엄마였으면 네가 저지른 일을 수습할 생각을 하면서 큰 소리로 야단했을텐데.

  나이가 들면 나도 손주들한테 너그러워질까? 우리 엄마처럼?

이전 02화 속 깊은 20대 아들이 엄마랑 대화한대요(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