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20대 아들이 엄마랑 대화한대요(3)
절망
엄마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절망스러울 때가 언제였어요?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어요?
‘절망’? 너는 절망을 느낀 때가 있었나보구나. 너 먼저 얘기해볼래?
제가 고3 때 내신을 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수시를 써야 되니까 6장 모두 썼잖아요. 수능 보기 전에 3개 대학 발표가 났고, 결과는 불합격.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더라구요. 어쨌든, 저는 정시에 희망을 걸고 있었고, 솔직히 수능 보고 나서도 결과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 했어요. 그래서 수능 마지막 과목이 끝난 직후에는 정시로 연고대 정도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수학 때문이었어요. 제가 고3때, 6모 수학은 90점, 9모는 88점이었는데, 그때는 21번, 29번, 30번을 잘 못풀었거든요. 근데 수능 시험에서 29번은 풀고, 21번이나 30번이 아리까리정도. 그래도 어찌됐든 그 문제를 풀어서 나름의 답이 나온거예요. ‘아 이거는 최소 92점이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답지가 올라와 있을거 아니예요? 핸드폰을 받자마자 수학 답지를 봤어요. ‘21, 29, 30번 중에 적어도 2개는 맞췄겠지’ 하면서. 그런데 그 3개가 다 틀린 거예요. 그때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절망스러웠던 1초의 순간이예요.
3개 문제 모두 틀렸다는 것은, 재수 1년 확정이라는 거니까. 재수를 하면, 보통은 고3 때 설정했던 목표보다는 상향 조정 하잖아요. 1년 잘 보내면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또는 갈 수 있었던 대학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문제는 국어였는데, 재수 한 달 후에 3에서 1등급으로 순간 점프하면서 바라던 희망이 더 가까이 온 거 같았어요. 신체적, 정신적으로 당연히 힘들었지만, 희망을 경험하고 나니까 수월하게 지낼 수 있더라구요.
재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 찰나의 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절망스러웠는데 그것이 기대(희망)로 바뀌는 시점에서 극복되어졌어요. 되돌아보면 시험 못 본 것이 오히려 다행인거 같아요. 아니었으면 어떻게 의대를 갈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이후로 절망스러운 일은 없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전화위복을 생각하며 긍정적인 관점으로도 바라보게 되더라구요.
엄마는, 올해 2월 26일, 너의 외할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전화를 받고 춘천에 내려갈 때 슬펐어. 그 슬픔이 어떤 슬픔이냐면 ‘아빠가 아파서 어떡하지? 빨리 나으셔야 될 텐데.’ 정도의 속상함이 아니라, 이제 곧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으로 인한 슬픔이야.
근데 병원에서 할아버지를 뵀는데 컨디션이 좋은 거야. 말씀도 하시고, 정신도 또렷하시고. 그러니까 미리 겁먹은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놓였지. 그런데 너도 기억하다시피 엄마와 대화하고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응급상태가 돼버리셨잖아. 자가 호흡도 안되고, 심장 기능도 떨어지고, 혈압도 맥박도 떨어지고, 기도 삽관까지. 전날 엄마랑 대화를 나누시던 분이 기도 삽관을 하니까 당연히 말을 못하시지.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외삼촌하고 엄마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니. 일반병실로 옮겨서 단 하루만이라도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이틀 후에 천국 가셨잖아. 그때의 그 절절한 슬픔은 엄마가 가진 언어로는 절대로 표현 못해.
네가 ‘절망’한 순간을 물어봤기 때문에 ‘절망’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찾아봐야겠다.
‘절망은 극한 상황에 직면해서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 정신 상태’ 로 적혀있네.
이 땅에서 아빠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극한의 상황이거든.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절망’하게 되더라. 이후로는 그 어떤 것도,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 거야.
엄마가 올해 휴직을 하면서 하려던 게 많았고 세운 계획도 있었는데 다 헛되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그런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되더라. 중∙장기 계획? 이건 인간의 오만에서부터 비롯된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예측하지 못하는 인간이 무슨 계획? 그러니까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거라는 생각을 한거지.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 견디며 사는 거지.
엄마는 절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진 않았거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슬퍼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일상을 살아 내고 있더라.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만한 기회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시간이 절망을 극복하게 해준 거지. 그래서 지금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고 있지 않니? 엄마는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절망과 슬픔 상태를 그대로 놔둔 채 지내면서 시간이 나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랬던 거 같아. 그렇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마음으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예전과 같은 활력을 되찾기도 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극복해낸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고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도록 그냥 둔 거군요. 방치? 엄마가 아빠(외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절망했는데, 그것을 극복하지 않은 채로 그냥 두셨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터졌을 때, 이전의 감정까지 소환되면서 가중되어 더 우울해 질 것 같은 불안감은 없는지 궁금한데요?
가족의 죽음이 굉장히 높은 스트레스에 해당되더라구. 그 중에서도 배우자의 죽음이 가장 강도가 센 스트레스이구. 아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슬픔과 동시에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해. 그래서 ‘우울’을 겪기도 하구.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와 또 영원한 이별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은 예전 감정까지 떠오르면서 슬픔이 가중될 거 같지는 않아. 왜냐하면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내가 너무 좋아하던 할머니 죽음까지 소환돼서 슬픔이 더 커지지는 않았거든. 그러니까 내 주변의 어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너의 외할아버지와의 이별의 슬픔까지 합쳐져서 더 우울해질 것 같은 불안은 없어.
엄마가 후회스럽고 슬픈 감정,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 살아계신 외할머니께 더 잘해드리는 것으로 과제를 설정했다면 어땠을까요?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겠지만 추억이 많은 만큼 이별할 때의 상실감이 정말 클 거 같아요. 그런데 엄마처럼 그냥 지금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회복하는 것이 감정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