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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씅쭌모 Oct 02. 2024

'화평'을 선물로 주고 가신 아빠

2024년 2월 26일 월요일 오전 11시 즈음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토요일 저녁부터 가슴이 많이 아프셨는데 응급실에 의사가 없을 거란 생각에, 오늘 아침까지 참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응급진료를 받아야하는 위급한 상황이라며 평소 진찰 하시던 교수님께서 직접 시술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두서없이 말씀하시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던 터라 심각함을 느끼고 몇 가지 옷만 챙겨서 바로 춘천으로 향했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신랑이 같이 간다고 해서 반일 휴가를 내고 함께 갔다. 이대로 천국 가시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니 한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차 안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눈물만 주르를 떨구며 아빠를 생각했다.


춘천에 도착해서 집으로 먼저 갔다. 중환자실에 계시는 아빠를 면회할 수 없다고 해서...... 집에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교수님께서 급히보자 하셨다. 8~9년 전에 혈관 확장시술(스텐트 시술)할 때 심장 왼쪽 혈관에 스텐트 4개를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래 작은 혈관은 모두 막혔고, 오른쪽도 굵은 혈관의 90%정도 막힌, 급성심근경색 응급상황이었음을 말씀해주셨다. 1차 시술로 왼쪽의 작은 혈관은 모두 뚫었고, 오른쪽 혈관도 뚫으려 했는데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 60% 뚫고 닫았다고 한다. 아빠의 컨디션이 좋아지면 이틀 후 2차 시술을 통해 다 뚫으려 한다고 덧붙이셨다. 다만, 심장초음파 검사에서 아빠의 심기능이 정상 기능의 1/4밖에 되지 않아 2차 시술이 힘들 수도 있다고 하셨다. 스텐트시술 이후 3개월에 한 번씩 성실하게 검진을 받으셨고 그때마다 불편한 부분이 크게 없다고 말씀하셔서 심장초음파 검사를 따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씀하실 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빠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계속 주책없이 쏟아졌다. 


  교수님의 배려로 면회 시간은 아니지만 아빠를 면회할 수 있었다. 오후 4시쯤이었는데 아빠의 목소리와 발음은 평소와 같이 크고 분명하셨고, 숨차거나 숨가쁨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아빠 모습에 2차 시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안도하면서도 손과 발이 침대에 묶여있는 불편한 상태의 아빠의 손발을 어루만지면서 또다시 밀려오는 슬픔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교수님께서는 1차 시술 할 때, 아빠의 의식 여부 확인을 위해 마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을거고, 지금도 진통제나 수면제를 넣으면 의식 저하의 원인이 될까 염려되어 약을 쓰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니 토요일부터 며칠간 편히 주무실 수 없었으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실까? 아빠가 오늘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병실을 나왔다. 


  중환자실에서 아빠와 대화하고 나서는 곧 괜찮아지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날이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한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못했고, 아빠가 꼭 하시고 싶은 말씀도 듣지 못했다. 정말이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 없는 얘기만 하다가 병실을 나온 거 같다. 주어진 면회 시간은 5분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2024년 2월 27일 화요일


  오전 11시 면회 시간에 아빠를 다시 볼 수 있다고 하셔서 밤늦게 내려온 동생들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아빠의 컨디션이 좋으셔서 어쩌면 2차 시술을 하실 수도 있을 거 같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우리 삼남매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9시가 안된 시각에 병원에서 온 전화 벨소리에 모두 긴장했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빠의 혈압은 급격히 떨어지고 의식은 저하되고 게다가 자가 호흡이 어려워 기도삽관을 통한 인공호흡기를 달았다면서 병원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쉴새 없이 눈물이 쏟아지며 마음은 불안했다. 아빠를 보러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가족 모두 절제하지 못했다. 혈압은 50/38 정도, 점점 떨어지는 혈압수치를 보며 아빠 손을 꼭 잡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아빠가 삼남매에게 써주신 편지 잘 읽었다고. 힘들고 어렵게 학교에 다니신 아빠가 성실하게 사신 덕분에 우리 삼남매가 가정을 이루며 잘 살 수 있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 아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 나도 울었다. 아빠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한참 동안 아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생각했다. 아빠도 어제 면회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텐데 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을 거고, 평소 더 많이 표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거 같다.


  우리 가족의 짧은 면회 덕분인지 혈압이 상승했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며 깨어나시길, 회복하시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감사했다. 


  교수님은 하루 종일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는 우리에게 다가와, 오후 6시쯤 회진하는데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집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중환자실 앞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으면 간호사들의 마음이 무겁고 부담스럽다고하셔서 너무 우리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며 집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집으로 간 것이 아빠에게 느껴진 걸까? 집에 도착한 후 얼마 있지 않아 빈혈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수혈을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역시나 우리가 없어서 아빠가 불안한 것이 아닌가 하여 삼남매는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자기로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긴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2024년 2월 28일 수요일


  새벽 6시, 중환자실로 들어오는 입구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니, 시부모님께서 걸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보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새벽기도 후에 누구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오신 것 같다. 아버님 어머니는 마음이 평안하다 하셨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계속 울지만 말고 엄마도 계신데 씩씩하라고 하셨다. 그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아빠의 수치가(혈압, 맥박, 관상동맥) 최저 안정상태에 있으니 하루에 한 번 면회를 하고, 2명만 허용하겠다는 안내를 받았다. 단호하게 전하는 간호사에게, 언제 이별할 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2명만 허용하냐고 울면서 요청 드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오늘 인천으로 가야 하는 남동생 두 명이 먼저 면회하고, 내일 오전에 엄마와 내가 면회하기로 했다. 남동생은 면회 후, 자신이 묻는 말에 동생 손을 꽉 잡으면서 듣고 있으시다는 신호를 보내셔서 아빠의 체력과 삶에 대한 의지가 여전히 있음을 느꼈다며 눈시울이 붉어져 이야기했다. 그 말에 또 한 번 아빠가 불쌍해서 울었다. 선하신 우리 아빠가 고통 가운데 끝까지 버티며 우리 모두를 보려고 안간힘을 쓰시는 거 같아서 마음이 저렸다. 아빠가 고통스럽지 않고 그저 평안하기만을 연신 기도했다. 진통제를 쓰지 않고 있어 그 고통이 온몸으로 느껴지실텐데 얼마나 괴롭고 아프셨을 지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쓰리다.


  면회 후 남동생네와 우리 식구들은 자신의 일상 터전으로 갔다. 엄마와 나는 집으로 와서 샤워를 하고 눈 좀 붙이려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잠이 오지 않아서 오후 회진을 하실 교수님을 운 좋게 볼 요량으로 병원에 갔다. 병원 1층 카페에서 음료수 7병을 사서 중환자실로 갔다. 그동안 중환자실의 간호사님들을 귀찮게 해드린 것 같아서 (마치 우리 아빠만 중환자실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미안한 마음에 구입했다. 다행히도 오후 회진 후, 병실에서 나오는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오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로서는 나아졌다고도 볼 수 없고, 그렇다고 긴급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만 하셨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음료수를 건네니 마음만 받으시겠다며 정중히 사양하셨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엄마와 수요예배에 갔다. 가는 길에 순복음 교회 김은영 권사님을 만났고 권사님은 우리 먹으라고 교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팥칼국수 메뉴를 주문해주고 떠나셨다. 팥칼국수를 다 먹지는 못했지만 그 따뜻한 마음에 감동되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아빠 혈압이 떨어져서 승압약을 다시 투여했고 지금은 나아졌다는 내용이었지만 불안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 잠을 청했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10시쯤 병원에서 또다시 연락이 왔다.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 저하가 심해져서 지금 빨리 올 수 있냐고 물었다. 15분 내에 가겠다고 말하고 뛰어갔다. 


  교수님이 퇴근도 못하신 채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지금은 의식이 있는 상태인데 가족분들이 모두 병원으로 오시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셨다. 두 시간이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럼 그 시간까지는 재워드리는 약을 쓰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동안 수면제도 진통제도 없이 아프셨을 아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래도 의식이 있는 아빠와 마주하려면 두 시간은 아빠가 더 견뎌 주셔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재워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아빠에게  초인적인 힘으로 견디게 하실거라 믿었다. 엄마와 내가 먼저 병실로 들어갔다. 무엇인가를 계속 말씀하려고 입술을 들썩들썩 하셨는데 인공호흡기 삽관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답답해 하시는 거 같았다.

  "아빠, 사랑한다고요?, 미안하다고요?" 물으니 손을 꽉 잡으셨다.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애써 참았다. 엄마가 아들도 지금 오고 있다고 하니 아빠는 또 입술을 벌려 뭐라고 얘기하셨는데 엄마는 무엇인지 금방 알아채셨다.

  "뭐하러 불렀어?" 였다. 우리는 "당연히 와야지." 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자식들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이란......

  엄마는 평소 하지 않는 말을 하셨다. "여보 고맙고 사랑해", 나도 평소에는 하지 않는 말을 했다. "아빠 사랑해요"를 연발했다. 그리고 아빠 귀에 대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두려움 없게 해달라고....


  곧이어 목사님께서 오셨다. 임종 예배를 위해 중환자실에 혼자 들어가 예배를 인도하셨고 아빠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셨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임으로...


  목사님께서 중환자실에서 임종 예배를 드릴 때 의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셨다. 감사하게도 아빠가 믿음의 고백 후에 평안하셨다 라는 말씀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나 식구들이 도착했다. 모두 왔다고 중환자실에 기별을 했으나 1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어서 다시 문의하니, 지금 의식 저하가 심해서 조금 지연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에 모두 들어갔다. 세 시간 전의 아빠와 확연히 달랐다. 혈압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눈동자는 윗부분만 살짝 보이고 눈은 한 곳을 응시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너무 슬펐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깊고 절절한 것인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거 같다. 밖에서 기다리라는 간호사의 말에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아빠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난 해 11월 아빠 생신 때, 마치 유언 같은 편지를 주셨는데 그 얘기가 어쩌면 꼭 하고 싶은 말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가난한 어린 시절,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며 힘들게 학교를 다녔지만 이후 즐겁게 직장생활 하면서 자식들 모두 어렵지 않게 공부시키고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형제간 화목하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


   나는 아빠와 마지막 대화를 할 수 있는 선물을 달라며 간절히 원했지만 아빠는 내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빠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는데 그건 아빠의 유언 같은 편지 속에 담긴 ‘화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조카들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에 오랜 시간 지켜보니 개성이 강한 사랑스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보아주라고 하신 거 같다.


  교수님께서 원래는 우리와 면회 후 아빠를 재워드린다고 하셨는데 이미 혈압이 많이 떨어져 있고 의식이 없어서 재워드리는 약 투입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2024년 2월 29일 목요일


  오전 8시쯤 중환자실에서 호출이 왔다. 엄마, 남동생, 신랑, 나 이렇게 다섯 명이 병실로 들어갔다. 불과 3일 전 월요일에는, 나와 소리를 내며 대화를 했는데, 만 사흘이 지난 지금은 혈압도, 맥박도 0인 그저 인공호흡기만 작동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다니...... 남동생은 아빠의 얼굴과 가슴, 팔, 다리를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가 사망을 선고했다.

  “2024년 2월 29일 오전 8시 34분 조규*님,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선고 이후에도 우리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아빠를 만지며 계속 서 있었다. 나갈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조심스레 나가라고 얘기했고 아빠에게 있었던 그 많던 줄을 모두 빼고 나서야 아빠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빠는 하얀 천에 쌓여 장례식장으로 가셨다.


  며칠 동안 중환자실 밖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도하며 기다리고 자는 것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천국에 가셔서일까? 온몸에 힘이 빠지고 얼굴 근육은 굳어지고 머리는 무겁고 어지러워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수액을 맞지 않으면 나도 일어나지 못할 거 같은 생각에 아들과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았다. 바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처방해준 약을 먹고 어지럼 증상은 사라져서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와서 휴대폰을 봤다. 동료들이 조문 오겠다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조문을 받을 수 없는 컨디션이라 오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인사만 하고 돌아가겠다며 기어코 한밤중에 왔다. 그냥 와준 나의 동료들을 보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아빠 얘기만 꺼내면 눈물이 난다.



2024년 3월 1일 금요일 입관


  2시에 입관이 있어서 가족들과 조용히 내려갔다. 입관실에서 아빠는 평소 교회 다니실 때 입으시던 양복을 곱게 입고 누워계셨다. 그냥 편안히 주무시는 거 같았다. 아빠의 얼굴, 팔, 손을 만졌다. 차가웠다. 온기가 하나도 없이 눈을 감고 누워 계시는 아빠를 보니 또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마르지도 않는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의 영이 그 공간에서 우리를 지켜보셨을 거 같다. 훌쩍거리며 우는 모습, 마치 살아있는 아빠에게 말하 듯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모습, 찬송가를 부르는 우리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뭘 말씀하고 싶으셨을까?


  아빠는 하얀 면으로 얼굴이 가리어지고 온 몸을 감싼 후에, 작은 꽃으로 둘러 쌓인 관에 누으셨다. 아빠가 정말 돌아가신 걸까? 나흘 전에 아빠와 대화를 했는데 지금 이런 모습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황망하다. 평소 많이 안아드리지 못했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고, 그리고 아빠가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입관 예배를 드리고 올라오니 외사촌 식구들이 와 있었다. 아빠의 빈소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세 살 꼬마 아이의 재롱을 보며 웃고 있었다. 슬픔이 가시지 않는 장소, 사진 속 무표정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아빠의 빈소에서 어린 아이의 재롱을 보며 웃는 내가 이상했다. 입관 예배 때 인사 말씀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실 아버지를 기억하며 주어진 일상을 열심히 살겠다고 했는데 일상을 재미있게 지내면 아빠한테 미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24년 3월 2일 토요일 발인


  새벽 6시, 발인예배를 드렸다. 화장을 하고 수골하는 곳에 서서 우리는 멍하니 그 장면을 소리 없이 바라봤다. 영정사진과 위패를 들고 있는 장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어린 조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뼈가루가 담긴 유골함을 모시고 아빠가 섬기던 교회에서 마련해준 부활 동산으로 갔다. 아빠가 안치된 곳은 햇볕이 잘드는 동산 가운데에 마련되었다. 장남부터 손자 손녀까지 취토를 조심스레 마치고 안치예배를 드렸다. 

  임종 예배부터 안치 예배까지 그 모든 순서를 인도해주신 목사님과 1교구 평교구장님, 그리고 기도해주신 성도님들, 마지막 장례 일정까지 함께 하신 집사님 내외분과 지난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동행해주신 우리 시부모님, 아빠의 장례에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신 분들, 그리고 순복음 춘천교회에 너무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을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아빠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몹시 아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셨다. 



2024년 3월 3일 일요일

  

  온 가족이 순복음춘천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엄마는 성도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떡으로 답례했다. 떡을 드신 분들이 하나같이 맛있다며 인사해주셨다.



2024년 3월 4일 월요일


  엄마가 잘 지내시는지 하루에 여러 통의 전화가 온다. 참 고마운 일이다. 가족도 친척도 아닌데 그동안 함께 사역했던 분들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전화를 하신다. 엄마는  외롭지 않을 거 같다. 감사하게도 신랑이 춘천에 또 내려왔다. 아빠가 쓰시던 방을 함께 정리했다. 25년 동안 쓰신 붓글씨 책자가 정말 많았다.(서예는 뇌경색 이후 엄마가 아빠께 권유하신 취미활동인데 주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다니시며 붓글씨를 쓰셨다.) 아빠의 스크랩북에는 참 여러 가지가 있다. 건강 생활 수칙, 주민센터 수강증, 아빠가 쓰신 여러 글, 그리고 예배 후 말씀 요약까지.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병 일지처럼 아빠 몸이 안 좋을 때, 어디가 안 좋은 지 구체적으로 쓰신 부분을 발견했을 때다. 진료 받을 때 잊지 앉고 얘기하시려고 쓰신 거 같다. 춘천 집에 올 때마다 아빠 서재에 들어갔지만, 아빠가 뭘 쓰고 계셨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시는 지 궁금해하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가 된다. 

  25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에 단어가 바로 생각나지 않아서 하시고 싶은 말을 바로바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글로 쓰신 거 같다. 스크랩북을 보니 '아내에게 바치는 글'도 있었다. 아빠가 직접 쓰신 글은 아니지만 본인의 마음과 같다고 느꼈는지 쓰신 후에 읽어주시기까지 하셨다고 들었다. 그 글을 보고 가족 톡방에 올리니 남동생들이, 아무래도 요즘 갱년기 같다며 눈물이 계속 난다고 했다. 그동안 아빠가 정성스레 써주신 글을 감사함으로 받지 않았던 내 태도가 후회되어 또 한 번 가슴이 아파온다.



2024년 3월 5일 화요일


  국민 연금이 있어서 아빠가 자주 다니시던 새마을 금고에 갔다.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니 **영 이라는 분이 깜짝 놀라며 그동안 좋은 글귀를 붓글씨로 써서 갖다 주시고, 자주 오셔서 호탕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왜 갑자기 돌아가셨냐며 안타까워 하는 모습에 또 울컥했다.


2024년 3월 6일 수요일


  엄마와 인천 집으로 왔다. 춘천에 엄마 혼자 계시면 외롭고 힘들 거 같아서, 한달 정도라도 같이 있자고 계속 말씀드렸더니 고민 끝에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2024년 3월 27일 수요일


  아빠와 이별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엄마는 우리 집에 계시면서 아빠의 부재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시는 건지 참는 건지 모르겠지만, 감정의 동요가 별로 없으시다. 본인은 씩씩하게 잘 살 자신이 있으시다며 이제는 춘천에서 지내시겠다고 했다. 

  오늘따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계속 난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때는 내 일상이 너무 소중하게 생각되었고 나의 일에 분주하여 전화도 잘 안드렸는데, 천국 가신 아빠가 왜이리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빠가 아프시면 춘천까지 가는게 힘들어서 아프지 않기를 바랬던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그저 원망스럽다. 평소 아빠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실 때 즐거운지, 뭘 필요로 하시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아빠가 안 계신 지금에서야 아빠가 쓰신 글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때 아빠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못했는지 자책하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춘천에 있는 공지천을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시며 자주 활용하시던 글귀를 인용해서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그런 아빠의 낭만과 낙에는 관심도 없이 자전거 타는 거 위험하다며 버스 타고 다니시면 좋겠다고 잔소리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너무 괴롭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도 어쩌면 나를 위함이었던 거 같다.

  

  “아빠,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흔들리는 나뭇잎, 파란 하늘, 예쁜 꽃을 좋아하신 아빠, 낭만적인 아빠, 그런 아빠를 힘껏 안아드리고 싶은데...... 아빠한테 제 손으로 제대로 된 식사대접 한 번 해드리지 못한 거 같아요. 요리를 못한다는 핑계로 늘 사드리기만 했어요. 요리는 못하지만 음식 한 번 차려드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빠,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을 때 저는 뭘 보면 될까요? 천국에 계시니까 파란 하늘을 보면 될까요? 아빠 사랑해요. 어렸을 때부터 난 아빠를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런데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이후 아빠는 말씀을 조리있게 하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들을 빨리 떠올리는 걸 어려워하셨는데, 전 그것을 아빠의 노력부족이라고 폄하했어요. 아빠가 그동안 쓰신 글들을 보면서 아빠가 얼마나 노렸하셨는지, 말대신 글로 얼마나 많이 표현하셨는지, 아빠가 떠난 후에야 알았어요. 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어요? 보여주셨어도 어쩌면 그때는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어요. 옆에 있을 때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니 말이예요. 아빠와의 이별을 통해서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그것도 잘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아빠 ‘아내에게 바치는 글’이라는 어떤 분의 노래 가사를 그대로 쓰시고 스크랩하신 것을 다시 보면서 또 울었어요. 아빠, 아빠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건데 아빠를 생각하면 제 마음이 너무 아리고 아파요. 아빠, 아빠가 천국에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제 꿈에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나는 여기서 너무 행복하단다 하며 나타나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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