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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국 Oct 25. 2024

10. 친절한 부모는 항상 옳은가?

포장된 강요

아이들이 다니는 태권도에서 가끔씩 소풍 개념으로 놀이동산을 간다. 아이들만 가야 하는 첫 소풍이기도 하고 사고가 날 수 있는 큰 장소이기에 많이 걱정되는 경우이긴 하다만 아이의 의중을 물어보고 원한다면 도전을 시켜주고 싶긴 하였다.

아빠 : OO아 태권도에서 놀이동산 간다는데 혹시 갈래?

엄마 : 너무 위험할 거 같은데!?

아빠 : 아, OO아 혹시 가고 싶으면 이야기해 줘 봐 친구들이랑 가고 싶다면......

엄마 : OO아 너무 위험할 거 같다. 걱정되는데 담에 더 크면 가자 알았지?

첫째 : 안 갈래.


아이는 안 간다고 했지만 나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것이 아이의 진짜 이유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 아이에게 몇 번을 물어도 아이는 엄마의 의도를 업은 대답만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념 고착적이다. 모든 사람의 행동, 말, 표정 등 표현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의 관념과 관련 있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행동, 말, 표정에는 언제나 관념이 숨어 있다. 위 대화에서도 당연히 엄마는 처음 새로운 곳에 가게 되는 아이가 걱정되고 걱정되는 마음이 아이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의중이 가득한 문장을 골라서 이야기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기회비용이 너무나 크다. 아이가 이번 도전으로 어떤 가치를 얻게 될지, 아이가 마음속으로 같이 가고 싶었던 친구가 있었는지, 언제쯤이면 소풍에 참여하고 싶은지, 아이가 태권도 친구 형 누나들과 어울리는 것에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이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자각하지 않고서 나의 의도를 아이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알았지?라고 수도 없이 물어보면서 우리가 아이에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내가 하는 말 알아 들었지? 그럼 내 말대로 해."


라는 일방적인 동의의 요청이다. 말투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 포장하면서 사실은 부모의 뜻에 따라 고분고분 따라 하는 아이가 되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즐겨 읽는 히로시마 레이코의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마스크 멜론빵 에피소드에는 아이를 유명한 아역배우로 키우고 싶어 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는 아이의 의중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아역배우를 시키고자 아이에게 친절하게 설득한다.


"넌 잘할 수 있어! 아까 잘했잖아 그렇지? 이거 잘하면 엄마가 너 좋아하는 멜론빵 사줄게~"


응원해 주고, 적절한 보상도 제공해 주고 말투도 친절하여 모범적인 문장으로 포장된 이 말에는 '엄마 말대로 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이가 엄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엄마는 또다시 친절한 말투로 알았지?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라고 물을 것이 자명하다.)


무서운 말투로 혼을 내는 경우를 자제하자던 지난 글에 이어서 우리는 이렇게 친절한 말투로 포장만 잘 된 강요의 메시지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친절에 포장된 말들이 가장 위험하다고 사료된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경우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후회를 하지만 친절하게 아이에게 강요한 경우에는 '난 아이의 의견을 잘 들어줬어. 아이가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거야'라고 착각할 수 있다. 심지어 추후에 '네가 원한다고 했었잖아!' 라며 역정을 낼 수도 있다. 아이의 마음, 아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에서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수용소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큰 변화가 없자 한둘씩 앓다가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희망의 부재로 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글을 썼겠으나, 나에게는 생각의 힘은 이렇게 강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해 준 일화이다. 생각이 육체를 지배한 것이다.


이런 힘을 가진 '생각'이라는 것을 부모가 대답을 강요하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끌려다니 도록 종용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버지니아 사티어의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는가에서 작가는 '개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자. 가족이라도 모두 같을 수 없다. 그들만의 결정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인정해 주자.'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부모는 친절한 말에 강압적 의도를 담지 말고 서로 소통하고 합의하여 하나의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아이를 인정해 주자. 무엇보다 우리 속에 '네가 뭘 알겠니'라는 마음을 없애버리자 어린이집의 분위기, 아이가 할 수 있는 것, 아이가 하고 싶은 것, 모두 아이가 제일 잘 안다. 정작 '네가 뭘 알겠니'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부모다.


이진민의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에서는 부모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게 하일이다.라고 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부모도 타인이다.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아이가 되려면 부모의 친절한 말로 감춰진 강요가 아닌, 아이 본인만의 기준과 가치관과 자존을 갖추도록 도와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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