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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게 묻다 - 4장 – 영란〔鈴蘭〕

by 준서 Mar 24. 2025

  여름의 장맛비는 낮게 내려앉은 구름처럼 세상을 눅눅하게 감쌌다. 연일 끈적한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사 온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이 낯선 동네에서, 나는 편의점에서 산 검은 비닐 소재의 우산을 펼치고 무작정 걷고 있었다.

  온도와 비가 섞여 덥고 끈적한 거리에서 진동하는 냄새는 비와 땀 그리고 여타 냄새 입자들이 뒤섞여 내는 냄새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내리는 거센 비가 흙이 가득한 땅에 처박혀 사방으로 흙을 튀기자, 그 흙 속에 감추어져 있던 냄새가 올라오는 듯했다. 동시에, 얇은 우산 위로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는 내 귀를 간질였다. 습한 공기와 같이 조금은 무겁고 답답한 마음으로 천천히 앞을 내딛던 그 순간, 갑자기 우산 끝에 ‘툭’하고 무언가 부딪혔다.

  나는 멈춰서서 우산과 함께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우산을 살짝 들자 모이는 건 내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이렇게 축축하고 습한 날씨에도 머리는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남자애는 우산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그 순간에 나는 입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몇초가 지나고 그 애의 눈을 피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그 남자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는 빗속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며 괜스레 목을 쓰다듬다, 다시 갈 길을 걸어갔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간단하게 끊어지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며칠 후, 새로 다니게 된 영어 학원에서 다시 그 남자애를 마주쳤다. 이 학원의 쉬는 시간의 복도는 항상 북적였고, 나는 일주일 동안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복도를 지나간 후에는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잠깐 한숨 돌리고는 했다.

  수업 시간은 정말이지 길게만 느껴졌지만, 어쨌든 그 늘어진 듯한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오기는 왔다. 나는 늘 그렇듯이 구석진 의자 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평범한 원무 중의 변주가 찾아왔다.     

  “혹시….”

  그 남자애가 먼저 나를 알아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산 부딪혔던….”

  그 애가 말끝을 흐리며 나지막이 웃었고, 딱히 웃음이 날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저 애가 웃어서 적당히 따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웃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저 애가 웃었기에 나도 웃은 건지는 아직 잘 알지 못했다.

  “맞아. 여기 다녔구나.”

  “응. 그나저나, 전에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혹시 이사 왔어?”

  “어. 이번 방학 시작하자마자 이사를 왔거든….”

  그렇게 물꼬를 튼 대화는 어색한 침묵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꽤 길게 이어졌다. 대화 주제는 특별한 것도 없었고, 서로가 금방 친해질 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애, 아니 이제 이름을 알게 된, 나연우와 대화하는 짧은 쉬는 시간에 나는 내 안에서 무엇인가 묘하게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대화하면서 나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말투와 얼굴에 서려 있었다. 약간의 그윽한 눈빛은 그 일렁이는 느낌을 증폭시켰다.

  일단 확실한 것은 이 남자애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인연은 아니나 비슷한 무언가로 남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언가 달라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 아이가 그 촉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은 깊어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늘 괜찮아 보였고,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속은 천천히,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이사를 온 후에 새 환경에 잘 적응하는 듯했지만, 그건 그저 겉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시은아, 공부하고 있지?”

  “아, 잠깐 쉬다가 그림 그리고 있었어요.”

  “학생도 직업이야. 공부하는 게 학생의 일이고. 지금 네 꿈보다는 일단 공부에 집중해. 하고 싶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속은 아주 천천히 곪아가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작은 화분을 마주했다. 잔잔한 흰색 꽃잎이 소담스럽게 달린 은방울꽃이었다. 내 생일인 5월 5일의 탄생화이기도 한 은방울꽃의 연둣빛 가녀린 줄기 위에서 고개를 내민 작은 방울들이 신비롭게 흔들리며 아침의 바람을 품고 있었다.

  은방울꽃은 조용하지만 은은하게 창가를 채웠고, 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행 중 행복이 어떤 존재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든 아픔을 덮어줄 것만 같은 가녀린 소녀는, 내가 보석처럼 아끼는 존재였다.

  4월 중순부터 5월까지 피는 은방울꽃의 꽃말은 꽃망울만큼이나 고운 것이었다.

내가 마음에 깊게 새겨둔 말이다.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건 나의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틀림없이 행복이 온다.

  나는 다시 한번 은방울꽃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매일 봐도 질리지 않았다. 꽃말부터 꽃의 생김새, 색과 잎의 생김새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일종의 진통제인 셈이었다.     

  창밖을 바라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한번 눈의 초점을 가까이하여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꽃말을 마음속으로 열 번이나 생각했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

          ·

          ·

  내 뇌가 행복했던 기억을 케케묵은 기억의 서랍 속에서 슬며시 꺼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질수록, 그 빈 자리는 미묘한 공허함과 아쉬움이 채워가고 있었다. …꽤 어릴 때였다. 일고여덟 살쯤이었나? 기억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은방울꽃을 좋아하게 된 지는 어언 10년은 지난 것 같다. 내게 말을 건넨 그 아이는 아마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을 것이다.     

  “시은아, 시은아!”

  “왜?”

  “여기 은방울꽃 좀 봐봐.”

  “오…, 이게 방울꽃이야?”

  “아니, 은방울꽃. 너 은방울꽃 꽃말이 뭔지 알아? ‘틀림없이 행복이 온다.’, 우리 엄마가 가르쳐줬어. 예쁘지 않아?”

  “…. 꽃말, 아니면 꽃?” 나는 물었다.

  “둘 다.”

  둘 다. 꽃의 생김새와 꽃말 모두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나, 나는 은방울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화분과 구근을 샀고, 화분에 은방울꽃 구근을 심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싹이 텄고, 꽃봉오리가 생겼다. 차례차례 꽃봉오리가 터진 후에는 황홀한 순간이 찾아왔다.     

  어린 시절의 짧은 기억이었다.

그 기억의 결말과 함께 나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

          ·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진짜?          

· · · - - - · · ·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문장을 머릿속에서 수백수천 번 외웠다.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눈물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간의 오랜 설움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그저 아름다운 은방울꽃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야.

대답해 줘그렇지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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