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말, 전남자친구에게 애정을 담아 쓴 선물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
The snow is coming down
후우-,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코끝이 시린 계절이 다가왔다. 지나가는 것을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시간은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나이를 먹은 만큼 빠르게 오는 것이 시간이라더니, 서른의 속도는 벌써 이마지도 왔나보다.
주변을 돌아보니 연말 분위기가 슬슬 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롤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붕어빵을 사주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고, 혼자 지나가는 청년은 두꺼운 코트를 여미며 한 손에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들고 바삐 걸었다. 한 해가 가는 것은 누군가에게 아쉬움이지만, 나에게는 변화의 공기가 달갑게 느껴지곤 했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무언가를 갈무리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가 다가왔구나- 싶은 순간으로 느껴졌다.
신나는 캐롤들 사이에서 Sia의 Candy Cane Lane 노래가 들려왔다. 그녀의 노래는 묘하게 사람을 감수성에 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 여기로 가야겠다. 홀린 듯이 마음이 가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페로 들어갔다.
딸랑, 귀여운 방울 소리가 울렸다. 카페는 마치 작은 정원같은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나무 목재로 지어진 오두막 같은 집안 곳곳에 초록 풀들이 싱그러운 분위기를 장식했다. 가운데 있는 커다란 트리는 소망편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지붕에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들이 매달려있었다. 아, 잘 왔다. 좋은 선택을 한 나에게 기분이 좋아졌다.
연말은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는 한다. 들려오는 캐롤 소리를 벗삼아 진열대에 있는 케익을 골랐다. 역시 초코가 좋을까? 그래도 예쁘게 생크림이 올라간 과일 케익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빙긋 웃으며 합의를 봤다. 좋아, 핫초코와 생크림 케익을 고르면 완벽할 것 같아.
따뜻한 아메리카노까지 세 가지 메뉴를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가는 조금 춥지만, 밖을 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 창이 없으면 시선의 끝이 벽뿐이라 답답한 느낌이 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 나는 자유로움을 좋아했다. 마음이 탁 트이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
그런 생활을 동경했고 내가 보는 세상이 내가 아는 전부가 될까 항상 무서워했다..
홀짝,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조금씩 마셨다.
나는 뜨거운 것을 맛으로 느껴야한다고 생각해서 종종 입천장이 까지고는 했다. 현우는 이런 나를 보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걱정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방금도 혀끝을 살짝 데였지만, 재빠르게 혀를 내밀고 열기를 식혔다. 현우는 초코를 좋아한다. 나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현우는 유독 좋아해서, 같이 만나는 날들이 늘 수 록 초코를 먹는 횟수가 늘어가고는 했다. 설탕이 들어간 다른 간식들보다도 초콜릿이 가지고 오는 달달함은 차원이 달랐다. 입안을 꾸덕하게 채우는 초콜릿은 카카오의 향긋함과 머리끝까지 채워지는 달콤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같이 당뇨에 걸리지 않을까? 그래도 둘이 걸리면 괜찮을 수도 있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던 중, 흰 얼굴이 보였다. 어라, 현우다.
길 끝에서 표정 없이 걸어오던 남자는 손 흔드는 나를 보고 빙긋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현우의 웃는 얼굴을 참 좋아한다. 가만히 있을 때는 냉정해보이지만 한껏 웃을 때는 앞 광대가 봉긋 튀어나와 특유의 귀여운 얼굴을 만들어주고는 했다. 가늘게 반달을 그리는 눈가, 밝게 빛나는 볼, 그리고 시원하게 그어지는 입술 끝을 사랑했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한없이 바라보게 되고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의 웃는 모양을 닮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나는 이렇게 웃지 않았는데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나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오늘은 저번에 내가 선물로 준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온 듯하다. 입은 모양을 보여주겠다고 사준 다음 날 바로 입고 총총 걸어오는 모습이 여지없이 큰 강아지 같았다. 서늘한 바깥 풍경에 새겨진 현우의 하얀 목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에는 목도리를 사줘야지. 현우는 사실 큰 덩치에 비해 추위를 정말 잘 탄다. 앞으로 하나 둘, 챙겨주고 싶은 목록이 머릿속에서 통통 생겨났다. 현우는 영양제를 잘 안 먹지만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하니 사주는 게 좋겠다. 그리고 같이 입을 커플 아이템을 조금 더 맞추는 것도 좋다. 그리고 사진관에서 예쁜 사진을 같이 찍는 것도 좋겠다. 아직 핫초코를 마시기 전인데도 기분이 금세 달아올랐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응, 아까 전에!
은지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응? 무슨 소리야. 나는 항상 일찍 왔지!
으음, 그래? 애매하게 웃으며 져준다는 듯이 현우가 맞은 편에 앉았다.
“현우 맨날 아이스 먹는데 추운 날이니까 몸에 좋으라고 따뜻한 걸로 시켰어!”
싫어할까 생각했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추웠던지 현우는 별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다. 이제 연말에 뭐할지 계획을 세워야 해서 오늘 우리는 할 일이 많았다. 미리 예약한 연말 콘서트도 있었고 앞으로 가야할 여행 계획도 좀 더 세워야했다. 그리고 새롭게 바뀐 내 직장으로 자취할 집도 구해야 했다. 중간에 하루 더 같이 있고 싶은데 현우가 곤란해 하려나? 현우의 난처한 모습을 벌써부터 상상하며 설핏 웃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적막 속을 음악과 말소리가 매꾸어간다. 아늑한 공기가 감도는 카페는 한 사람, 두 사람 들어오며 좀 더 따뜻해졌다. 어느새 주변의 많은 자리들이 서서히 채워져가고 있었다. 바깥은 조금씩 어두워져 반짝이는 가게의 불빛들이 골목을 비추었다.
12월의 어느 날,
차가운 겨울 저녁은 점차 깊어가고 있었고, 서로에게 보내는 눈빛이 따듯한 커플은 앞으로의 나날에 대한 꿈을 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