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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8. 2024

Aria

  Prologue -Aria 


  “올라가지 마! 올라가지 마!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니. 제발! 제발! 태우야....” 나는 고함을 지르며 베란다로 달려가, 에어컨 실외기 위의 아이를 그대로 밀어버렸다. 순간 어색한 표정으로 내 팔목을 붙들려는 그 작은 손을 미련 없이 떨쳐버렸다. 

  “우에.... 우에.....” 동물 같은 아이의 외침이 공중에서 흩어져 갔다. 창문 가득히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고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연분홍 꽃잎처럼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원망하는 눈빛이 아른거렸다 스러졌다.   


  번쩍 정신이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손이,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애가 떨어졌어요. 살려 주세요! 빨리요!” 

  마음은 다급했고 생각은 소용돌이쳤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반복해서 내 주문만을 외워댔다. “설거지하고 있을 때 아이가 에어컨 실외기 위로 올라갔다 사고가 났다. 뒤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득히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주문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거실을 맴돌고 있을 때, 일렬종대의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서서히 볼륨을 올리며 다가와서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문이 쿵쿵거리더니 머뭇거릴 틈도 없이 다시 한 번 쿵쿵거렸다. 벽이 흔들릴 정도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돌리며 나는 두려움을 향해 외쳤다.     

  “설거지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떨어졌어요. 진짜예요!” 

  외침은 공염불처럼 사라졌고, 나는 그들을 따라 황급히 나갔다. 어둑한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옆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구조대원이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아이가 나무에 걸렸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우에.... 우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뭇잎 사이로 햇살에 반짝이는 태우가 보였다. 아이는 밀림의 타잔처럼 나무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사다리차를 타고 능숙하게 아이를 밑으로 내려, 들것에 눕힌 다음 앰뷸런스에 태웠다. 사이렌 소리는 화사한 4월의 도시를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멀뚱히 누워 있는 아들을 보며 흐느꼈다.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 영혼 지치고 연약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 밀려와 마음이 무거울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는 가만히 침묵 속에서 기다립니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당신이 다가와 곁에 앉을 때까지


  


2018년 4월 1일, 진해, 윤정민 

 

  삐삐, 삐삐. 오전 5시 정각. 침대에서 일어나 나무 바닥이 삐거덕거리지 않게 발걸음을 부엌으로 옮겼다. 유리컵에 보리차를 가득 부어 다섯 번으로 나눠 마신 다음 싱크대 옆 작은 창문을 삼분의 일쯤 열었다. 선선한 새벽공기 사이로 따스한 봄 냄새가 났다. 4월의 축제를 예고하는 기운이다. 화장실로 이동해 간단히 용무를 끝낸 후, 옷을 챙겨 입고 현관에서 오늘의 신발로 아식스 999를 골랐다. 신발장에는 똑같은 아식스 운동화가 9켤레나 있지만, 그 안쪽 면에 이름과 첫 번째 끈 뒷면에 111부터 222, 333, 그렇게 999까지 아주 작은 숫자를 적어 구분하고 있다. 매일 새벽 달리기에 앞서, 나는 이 중 한 켤레를 골라 신는다. 언제부터 똑같은 운동화를 돌려가며 신었는지 모른다. 그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항상 똑같은 운동화를 신으면 질리지 않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저 내 스타일이고 기분이 좋아지는 개인적 의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똑같은 옷 수십 벌과 똑같은 신발 수십 켤레를 지겨워 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런 부류일 뿐이다. 미닫이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나와 발목과 허리를 가볍게 풀며 시간을 확인했다. 5시 10분. 제자리 점프 두 번 후, 이어폰을 꽂고 설레는 거리로 달려 나갔다. A-ha의 Take On Me 신나는 전주가 시작된다. 오늘부터 이 차분한 도시는 긴 잠에서 깨어나 축제를 시작할 것이다. 


  내 이름은 윤정민. 나이는 23세. 태어난 곳은 일산이지만 중1 때 아버지 고향인 이 도시로 이사했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1년 전 휴학하고 다시 돌아왔다. 이유는 홀로 계시는 아버지 건강이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름은 윤성진. 나이는 63세. 나와는 정확히 40년의 나이 차가 있으니 아버지 연배에 비하면 늦은 나이에 아들이 생긴 것이다. 흔히 노령에 건강이 악화하였다 하면 암 같은 신체적 질병이나 치매 같은 정신질환을 떠올리겠지만 아버지는 다소 기괴한 병이었다. 내가 특별히 효자라고 부를 수 없음에도 굳이 휴학까지 하며 그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만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병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엄마에 대한 상실감도 있어서 그에 대한 걱정은 배가되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신비주의란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건 자신에 대해 뭐든 명확히 말하지 않는 성향이 만들어 낸 것으로, 내가 보기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갑갑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끔 보는 사람들에겐 그 희미함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 집 근처에서 작은 학원을 하나 운영했는데 학원이란 곳이 한적한 주택가 구석에 박혀 있는 일반 가정집이었고, 입구에는 변변한 간판조차 따로 없었다. 옛날 주택에나 붙어 있을법한 명패 모양의 작은 나무판에는 아주 작은 세로 음각으로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면」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가정법의 학원명이 「내가 말을 잘 할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했다가, 최근에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드나드는 수강생도 있을 리 만무했다. 전국 어디에도 그런 학원이란 없을 것 같았다. 친구들도 그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냐며 수군거리곤 했다. 지금도 그가 왜 그리 외진 곳에서 그런 이상한 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또 생계는 어떻게 꾸릴 수 있었는지, 그 내막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돈 걱정 없이 살긴 했다. 용돈도 두둑이 받곤 했는데 다만 그 방식이란 것이 특이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정기적으로 받거나 좋은 성적을 올려서 받는 것이 아니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의 외국어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딱히 거창한 것은 아니고 주말이건 공휴일이건 상관없이 아침 7시 30분, 저녁 7시 30분에 퀴즈 형식의 단어와 문장 25개를 크게 읽고 외우는 것이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비자발적 신비주의가 있었는데, 그건 중학교 이전 기억이 상실된 탓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유치원 이후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때로는 영화 속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지만 나는 그 시기가 중학교 이후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일산 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기 때문이라는데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 내게도 발생한 것이었다. 기억 복원의 의식적인 노력은 포기한 지 오래고 심각한 고민도 내 성격상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별 탈 없이 중학교부터 새롭게 시작된 이곳 생활을 평범하게 보냈다. 친구 사이에 별문제는 없었고 성적도 그럭저럭 중상 정도를 유지했다. 때로 학교에 거짓말하고 수업을 빼먹기는 했지만 여자 친구를 사귄다거나 호방하게 음주·가무를 즐기는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거나 게임방에 몰려다니는 정도가 내가 누릴 수 있는 일탈의 전부였다.  

  기억상실이라는 신비주의의 흔적은 내 말투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는데 의식적으로 고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앞부분에 강세가 들어가지 않는 어투의 리듬감은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표식이었고 그 본류가 어디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해군 도시답게 서울말이나 전라도 또는 강원도 말을 구사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지만 나는 그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내 말투는 미국 교포의 한국어 같기도 했고 받침이 어색한 일본인이나 성조가 나타나는 중국인의 한국어 같기도 했다. 친구들은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서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원이 말과 관련된 곳이라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이상한 가정법 학원을 운영해서인지 외국어에 과도한 관심이 있었다. 집에서는 끊이지 않고 외국 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안방 침대 주위는 옷장 대신 영어, 중국어, 일본어책들로 빼곡한 책장만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책이라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신분석, 뇌 분석, 심리분석, 운동 분석 등 죄다 분석이라는 말이 붙는 것들이었다. 번역본이 없더라도 그런 어려운 책들을 굳이 외국어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교류도 거의 없는 그의 성격상 자기만족이라면 모를까 과시욕이라고도 볼 순 없었다. 그렇게 그는 외국 방송과 책들을 보며 온종일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의 병세가 심각해진 지난 1년은 예외였지만....


  기분 좋게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지난 1년간 나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코스로 이 길을 달렸다. 지겨운 생각은커녕 달리면 달릴수록 몸이 스스로 달리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조깅 코스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3개의 둥근 로터리인 남원, 중원, 북원 로터리를 돌아, 여좌천을 지나고 장복산을 조금 올랐다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오늘도 기점인 남원로터리에서 방사선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텅 빈 거리였지만 축제의 부산함이 느껴졌다. 경유 지점인 중원로터리를 반 바퀴 돌고 위쪽으로 계속 달려 나갔다. 종점인 북원로터리에 우뚝 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매번 봐도 광화문 광장의 웅장한 동상과는 뭔가 다른 현실적인 느낌이다. 북원로터리를 돌아 여좌천부터는 속력을 서서히 올렸다. 로망스 다리 좌우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 행렬을 빠르게 헤치고 나오니 장복산으로 향하는 경사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면서 발걸음도 느려졌다. 몸의 기어를 오르막으로 전환하고 자세와 호흡법을 바꿨다. 그 순간, 자갈 같은 것을 밟았는지 몸이 휘청거려 중심을 잡으려다 그만 두 발이 엉켜서 엎어져 버렸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주변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지만 처음이라 당황하긴 했다. 거기에 신발 한 짝마저 벗겨져 경사진 산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손바닥의 작은 찰과상을 바지에 가볍게 비빈 후 아래로 굴러간 신발을 찾았다. 익숙하지 않아 뭔가 찜찜했다. 그 때, 갑자기 등산로 펜스 옆의 큰 바위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자동차만한 바위의 엄숙함 때문인지, 어둑한 기운 때문인지, 온몸에 쫙 소름이 돋았다. 뭔가 바위 뒤에서 몸을 웅크린 채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귀신이나 사나운 짐승이 아니기만 빌었다. 나는 불길한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한 걸음씩 신경을 곤두세우며 내려갔다. 그제야 뭔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행히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바위 뒤에서 목을 빼는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내밀고 옷을 털며 어색하게 두리번거렸다. 몇 발자국 걸어 나오더니 몸을 숙여 무엇인가를 주웠다. 내 운동화였다. 조금 더 내려 가자 어렴풋이 형체가 보였는데 여자였다. 검정 야구 모자에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정 파마머리,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시선은 모자챙 끝으로 교묘하게 숨기고 있었다. 도무지 등산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신발 쥔 손을 바꾸고, 그 손을 겨드랑이에 집어넣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검정 가죽 장갑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빨라졌다. 슬쩍 뒷발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신고 있던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들고 산 위쪽으로 무작정 뛰었다. 날 잡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뒤돌아보면 그녀가 날 붙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실체 없는 두려움을 잔상으로 남긴 채, 땀범벅이 되어 맨발로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아식스 999 한 짝을 신발장 맨 위에 넣었다. 마루에 무릎을 꿇고 까맣게 변한 발바닥을 들어 올린 채로 화장실에 기어들어 갔다. 두렵고 괴상한 일이었다. 도망친 이유도 특별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1년 동안 똑같은 코스로 달리기를 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뒤숭숭한 기분을 뒤로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몸을 관성처럼 움직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밥그릇부터 식탁 위에 놓았다. 된장찌개를 데우고 두부 반 모를 먹기 좋게 잘라 넣었다. 머루 장아찌와 미나리무침, 우엉 당근 볶음과 멸치볶음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프라이팬에 달걀 2개를 넣었다. 아버지가 소리도 없이 식탁에 다가왔다. 백미를 밥그릇에 담고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시장한 듯 첫술에 밥을 가득 올렸다. 그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오늘 늦었네.” 

  “아.... 네.” 

  “얼굴이 어두운 것 같은데. 무슨 걱정 있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병든 그에게 이른 새벽의 소란 따윈 말해 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파란색 머그잔 2개를 테이블에 올렸다. 커피는 습관적으로 마시는 것이었지만 정해진 방식대로 만들지 않으면 고집스럽게 아버지는 커피를 남겼다. 온도 조절용 커피포트의 물을 80도로 끓여 머그잔을 한 번 헹군 다음, 커피와 설탕 두 스푼에 끓인 물을 잔의 나이테 흔적까지 정확히 맞춰야 했다. 물을 70도로 하거나 설탕을 한 스푼만 넣는 행위는 금방 들통이 났다. 그런 강박적 취향 때문 일까... 그의 희귀한 병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의 이상한 증세야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진 않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아들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비참한 조합은 누가 봐도 그 병이 가족력이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먼 옛날 조상의 잘못으로 지금에야 하늘의 단죄를 받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의 고요한 생활 리듬은, 어느 순간 이상한 주문을 만나면 동요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상황에 맞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는데, 듣고 있자면 솔직히 돌아버릴 것 같다는 표현도 모자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에 조용한 자기 방이나 산속의 암자 같은 장소에서 경을 외듯 혼자 중얼거린다면야 아무 문제 될 리 없겠지만, 지독하게도 그는 언제나 폴리에스터 재질의 허름한 남색 잠바와 카키색 면바지를 교복처럼 입고 시간·장소 불문, 그 이상한 주문을 외워댔다. 외출이라도 할 때면 사람들 시선에 신경이 쓰여 그와 거리를 둔 채 모르는 사람인 양 지나쳐 버릴 때가 많았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그가 쪽팔렸다. 마법을 기필코 이루려는 허공을 향한 그 의지 가득한 눈빛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부담 자체였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눈물까지 글썽일 때면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졌다. 차라리 배우가 되면 좋지 않았을까, 그 갈망을 연기로 승화했다면 명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다행히도 집에서 주문이 시작되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살며시 내려놓더니 특유의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오른 검지와 엄지를 오른 눈썹과 광대뼈에 갖다 대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난쟁이의 말을 들어라....”


  기계음처럼 낮은 목소리, 단순한 리듬, 반복 또 반복이다. 판타지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명령을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무슨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외에는 딱히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주문에 슬쩍 끼어들어 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역시다.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내 질문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 그리곤 갑자기 눈을 크게 치켜뜨고 섬뜩한 연기를 시작했다. 두 팔을 허공을 향해 곧게 뻗고 눈빛에 광기를 가득 모아 주문을 외웠다. 아.... 안습이다. 오늘은 겹겹이 쌓인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다. 엄마도 없는데 이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함이 몰려왔다. 그만 좀 하라고 악 바친 고함이 터져 나오려다 가까스로 또 참아 냈다. 그가 다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고요히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이 꿈틀거리더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기가 막힌다. 뭐가 고통스러운 것일까.... 

  힘없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팝콘처럼 부풀어 오른 벚꽃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고 따뜻한 봄바람에 고소한 빵 냄새가 아궁이 밥 내음처럼 풍겨 왔다. 축제다 뭐다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내 인생은 왜 이리 안 풀리는 걸까. 다시 짜증이 기어 나왔고 억눌렸던 중압감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왔다. 그가 내 인생에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새벽에 잃어버린 운동화 한 짝도 떠올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2002년 봄, 일산, 윤성진 

 

  요즘 들어 부쩍 초조하고 피곤하다. 아내의 묵묵한 고단함이 망령처럼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까. 새벽부터 시작된 정민의 기침 소리가 잊을만하면 반복되고 있었다. 개 짖는 것처럼 컹컹거린다. 검사라도 받아야 할 텐데 걱정부터 앞섰다. 그런 것도 지친 아내에겐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퇴근 후면 궁둥이 붙일 겨를도 없이 내 몫으로 남겨둔 밀린 설거지와 장난감 정리, 간단한 청소 등을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매일 살얼음판에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는 상황이랄까, 불안감이 떠나질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 10년 만에 결혼했고 아이를 얻었다. 늦게 시작한 육아라 부담감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한계를 느끼게 된 데엔 일상적 피곤함을 넘어서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던 아들 정민이 일곱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아기조차 자연스럽게 내뱉을 수 있는 엄마, 아빠라는 단어조차도 아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어부바하듯 등짝에 찰싹 들러붙어 다녔다.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결혼 후 정착한 이 도시는 아침이면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블랙홀처럼 에너지를 집중한다. 아침 7시 30분. 구심점의 에너지가 지글거리고 있었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휩쓸려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윤 팀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L 펀드입니다” 

  아침 9시를 넘기자, 안내 데스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탁상 달력에서 일정을 확인하니 어느덧 4월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감색 재킷을 입고 옷매무새를 다졌다. 서랍 맨 위 칸을 열어 명함 3장을 꺼내고 부서 캐비닛에서 기업소개서 영문판 3부를 가져왔다. 투자자들의 예상 질문에 대비해 준비한 자료는 인쇄 후 파일철에 순서대로 끼워 넣었다. 취합된 서류들을 탁탁 두드려 높이를 맞춘 다음, 옆구리에 끼고 예약된 회의실로 들어갔다.

  해외 투자자 미팅은 내가 전담했는데, 이유야 뻔했다. 외국어였다. 내가 외국어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는 우연처럼 다가왔다. 스무 살쯤 이탈리아 성당의 공사 과정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신이 내려왔다.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동경은 나만의 유산을 건축하고 싶은 강한 욕구로 변환되었고 그 대상이 무형의 외국어가 되어버렸다. 나만의 작품을 만든다는 상상을 하며, 한 단계씩 언어의 벽돌을 쌓아 나갔다. 굳건한 양생을 위해 즐겁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스텝을 밟아 나갔다. 그렇게 20년 넘게 영어, 중국어, 일본어 공사를 지속했다. 

  고객들이 들어왔다. 말끔한 쥐색 양복의 구레나룻 50대, 하늘색 재킷에 짧게 솟은 머리 40대, 흰색 블라우스의 키 작은 통역사, 삼총사였다. 출근길에 시달려 노곤함이 몰려왔지만, 내 손을 꽉 쥐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파란 눈동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팅이 시작되자 그들은 준비해 온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국 시장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호주나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원자재가 빠른 속도로 흘러 들어가는 것에 특히 주목하고 있어요. 조만간 조선·해운 시장의 성대한 파티가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분야에 강점을 가진 한국에 투자 기회가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멋진 구레나룻 신사가 말했다. 갈색과 흰색이 조화된 수염이 멋있게 보였다. 

  “전통적인 조선·해운 강국은 일본이었는데, 혹시 일본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한국은 메이저 말고 중소형 회사도 많은데 그런 곳도 관심이 있습니까?” 나는 뾰족 머리를 보며 물었다. 

  질문의 해답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었다. 작은 음료수 하나를 사더라도 이것저것 비교하고 따지기 마련이다. 고객의 자산을 운용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을 것이다. 뜨는 업종에서 뜨는 회사를 선택해 투자해야 한다면 작은 부분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업종 대표주가 아니었기에 투자 쇼핑의 희생양이 되기 쉬웠다. 질문의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물론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저희가 마켓 캡(시가총액)을 고려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우량회사를 발굴하는 펀드도 운용 중입니다. 당연히  덩치가 큰 회사에만 투자하는 것은 아니죠. 일본 조선사의 경우는 인건비가 발목을 잡고 있고 제조 현장이 자동화되어 있어 고객 요구에 유연한 대처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시기엔 꽤 치명적이죠. 그래서 예상되는 폭발적 추세를 잡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시장상황이 빠르게 바뀔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직은 시기상조겠지만....” 뾰족 머리가 차분히 말했다. 

  통역이 필요 없어 할 일을 빼앗긴 통역사는 나른한 표정으로 노트에 고급스러운 검정 펜으로 China를 적고 그 위에 동그라미를 두 번 쳤다. 

  최근 들어 외국 투자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개인적 고뇌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지만, 회사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를 잘 볼 수 없었다. 회사의 IR(Investor Relation)팀은 나를 포함해 총 세 명에 불과했다. 하루 적게는 3팀, 많게는 5팀이 방문했고 한 번 회의에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 소요되었다. 국제전화도 쉴 새 없이 걸려 왔다. 두 명의 팀원도 우수했지만,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투자자들은 미팅 시 팀원을 회의 상대로 원하지 않았다.  

  L 펀드의 주요 관심사는 최근 급격히 증가하는 선박의 발주량을 따라가기 위한 회사의 대안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의 핵심을 사실 그대로 짚어 주었고 추가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통역사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1시간 30여 분의 미팅이 끝나고 옥상 휴게실로 올라갔다. 변함없이 한쪽 구석에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약국에서 산 프로폴리스 벌꿀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탁 트인 양재천 곳곳에 분홍빛이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만 지나면 고향에서 출발한 벚꽃 행차가 이곳에도 도착할 것이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비상계단 문을 열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 왜?” 아내 혜경이었다. 

  “민이 대학병원에 데리고 왔는데.” 

  “뭐래? 폐렴은 아니라지?” 

  “폐렴은 아닌데, 선생님이....” 

  아내의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내심 불안했다. 

  “근데, 선생님이 왜?” 

  “민이가 정신과 진료를 받아 보는 게 좋겠다는데.” 

  “뭐? 정신과? 감기 때문에 간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애써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소아과 의사에게 정신과를 추천 받았다. 나는 두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쉰 후 어두운 계단을 터벅거리며 내려왔다. 

  “그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사무실 문을 열기 전, 나는 의식적으로 고민의 흔적을 지우고 긍정의 가면을 썼다. 고뇌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질까 두려운 지 내 등 뒤로 찰싹 들러붙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보다 시끌벅적했다. 옆 팀이었다. 

  “부장님 왜 숨기셨어요?” 기획팀 차장이 앉아 있는 부장의 뒤에서 말했고, 부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눈치였다. 

  “경사네요. 오늘 한턱 쏘세요.” 과장도 거들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공부를 잘했어요? 서울대 가려면 어릴 때부터 1등만 해야 한다던데.” 여자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했지 뭐.” 부장이 귀찮다는 듯 빙글 돌아앉으며 말했다. 

  부장의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사진이었다. 정문의 철제 모형이 보였다. 그의 아들은 모니터 화면 밖으로 보란 듯 활짝 웃고 있었다. 

  “비법 좀 알려 주세요.” 잠자코 있던 신입 사원도 가세했다. 

  “애가 네 살 때인가부터 한글을 떼고, 수다쟁이처럼 말을 하더니, 웅변 같은 것도 하더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부장이 웅변하는 연사처럼 한 팔씩 차례로 뻗으며 힐긋 내게 눈길을 돌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어깨 뒤로 흘리며 등에 업힌 무거운 그림자를 고쳐 업고 자리에 앉았다.          


  민이의 검진 날, 연차휴가를 냈다. “민아, 오늘은 엄마, 아빠랑 병원 가자.” 혼잣말이었다. 그동안 아들이 한마디 말조차 못 해도, 막연한 희망이란 것이 있었다. 그것은 20년 넘게 스스로 쌓아 올린 외국어의 자부심이었다. 아들도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라는 것이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었다. 나는 아들의 성이 모래성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했고,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80도로 끓인 물로 머그잔을 헹구고 커피 두 스푼에 설탕 두 스푼 그리고 물을 잔의 나이테까지 부었다. 거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두드리는 민이가 보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에 귀를 대고 다섯 손가락을 번갈아 두드린다. 마치 아래층의 누군가와 모스 암호로 교신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저렇게 기괴한 행동까지도 내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내 아들이 누구인데. 혹시 천재가 아닐까.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보고서야 그런 생각들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야?” 침묵이 흐른다. 

  “몇 살이야?” 역시 침묵이다. 

  “음.... 윤정민. 일곱 살.”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의사는 민이를 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흘렀고, 나는 고개 숙인 의사에게 말을 건넸다. 

  “민이가 말은 못 하지만 엄마 아빠 눈치도 잘 보는 것 같고, 듣는 귀는 있어서 지시도 곧장 따라 합니다.” 

  의사는 내 말을 귀로 흘리고 미리 작성해 간 설문지만 1장씩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답답했던지 혜경도 목소리를 높였다. 

  “한 살 이전에 옹알이는 했는데 이후부터 말이 없어졌어요.” 

  의사가 마지막 장에 멈춰 있던 시선을 들고, 엷은 입술을 열었다. 

  “정민이는 전형적인 자폐 스펙트럼 증후군입니다. 지금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니까 아주 심각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폐라면....” 기습 공격에 말문이 턱 막혔다. 혜경도 침묵했다. 민이는 진료실 구석 벽면에 귀를 대고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건너편의 누군가와 교신이 잘되고 있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밀검사를 진행해 봐야 압니다만, 언어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있고, 사회적인 소통능력도 떨어지며, 저렇게 자신만의 감각 세계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고도 자폐 증상으로 추정됩니다.” 의사가 나와 혜경 사이의 공간에 시선을 띄우며 말했다. 

  “선생님. 예전에 레인맨이라는 영화의 더스틴 호프만인가, 그런 증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자폐의 좋은 면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으로 물었다. 

  “딱, 자폐는 이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영화에 자주 나오는 현상도 자폐의 한 부류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말씀하신 건 서번트 증후군이란 건데, 일상 능력은 보통 이하라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있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그런 증상이지요. 피아노, 그림, 수학, 암기, 운동 등 천재성은 아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의사는 검정 뿔테 안경을 살짝 고쳐 올린 후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며 말을 이었다. “정민이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ADHD나 지적장애 정도로 보이지는 않지만....” 

  “ADHD는 뭔가요?” 

  “ADHD는 주의력 결핍 장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아이가 산만해서 차분히 집중하지 못하는 증상이지요.” 

  “그럼, 저희 아이는 일반적인 자폐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문득 내가 아들의 증상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는 그렇게 보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전문적인 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학원 같은 데는 다니나요?” 

  “그냥 제가 집안일 하면서 아이와 놀아 주거나 동화책 읽어 주는 게 전부입니다.” 혜경이 말했다. 

  “많이 늦었기 때문에 부모님도 많이 노력하셔야 정민이가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치료라고 하시면....” 눈살을 찌푸리며 혜경이 말했다. 

  “아직 국내에는 자폐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치료 기관이 많지 않은 데다 치료 방법도 확실한 것은 없지요.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죠. 언어치료부터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치료 기관은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자폐는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단호한 의사의 말에서 자폐라는 거인 골리앗의 이미지가 4차원 영상처럼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났다. 그 골리앗을 향해 이제부터 돌팔매질해야 하는 건가.... 험난한 미래가 몰려오고 있었다.   

  살면서 내가 정신과에 올 것이라, 아니 아들 손을 잡고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내도 충격을 받은 듯 병원 복도를 걸으며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침묵하던 혜경이 말했다. 

  “고칠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아질 거야.” 

  “큰일이야 정말. 우리가 너무 느긋했어. 치료 시기가 제일 중요한데 이미 늦었으면 아이를 두 번 죽이는 셈이잖아.” 아내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린 잘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어릴 때 말이 늦어서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대. 근데 지금은 남들보다 세 가지 언어를 더 하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지만, 룸미러로 보이는 아내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무슨 근거로 아이를 속절없이 방치만 했을까. “자폐는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소용돌이쳤다.


  


2018년 4월 2일, 진해, 윤정민 

 

  사람들의 들뜬 표정과 웃음소리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 아래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발목을 스치는 꽃무늬 원피스도 빙글빙글 함께 돌았다. 카메라맨으로 보이는 남자가 여행 잡지의 화보 같은 것을 촬영하고 있다. 그녀의 복숭아 뺨에 살포시 드러나는 보조개에 가슴이 설렌다. 하늘색, 분홍색 막대 솜사탕을 쥔 아이들이 여기저기 웃음을 흘리며 뛰어다니고 벚나무 앞은 한껏 귀여운 표정의 또래들이 보였다. 언제나 쓸쓸했던 벤치도 축제의 계절엔 온갖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무대에 오르기만을 기다려왔던 무용수처럼, 소풍날만을 고대했던 아이들처럼, 4월의 도시는 경쾌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지나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J 베이커리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J도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팔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점원과 가벼운 인사 후 생크림 토핑 데니쉬 식빵과 아메리카노 1잔을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J의 2층은 테라스로 연결되어 따뜻한 햇살 아래 책을 읽거나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기에 제격이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흐드러진 분홍 세상 사이로 벽면 나무 테가 곳곳에 벗겨진 낡은 목조주택들이 보였다. 세월의 흐름에도 일본식 적산가옥들은 여전히 이곳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4월의 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근대적인 분위기였다. 진동 벨 소리에 일어서려는데 저만치 쟁반을 들고 춤추듯 다가오는 주일이가 보였다. 


  “정민아, 왔네!” 

  주일은 중학교 동창으로, J 본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 도시의 전통 빵집으로 유명한 J는 그의 아버지가 두 곳을 운영하다 건강 문제로 두 아들에게 하나씩 물려주게 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빵집 운영에서 손을 뗀 채, 한 요양병원에 머물고 있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그 병원은 잔잔한 진해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데 근처의 대통령 별장도 부럽지 않을 정도의 고급 시설과 보안으로 유명했다. 주일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아버지를 문안했다. 그런 싹싹함이 있으니 형이 있음에도 J 본점을 물려받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단골이 되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장사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책 보냐?” 

  “달리기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들.” 표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맞아. 너 달리기 좋아하지?” 

  “어. 왜?” 

  나는 그에게 달리기에 관해 얘기한 기억이 없었다. 물론 지난 1년간 장복산을 달렸던 것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너. 중학교 때 전학 와서 유명했던 거는 기억 나냐?” 추억을 그림으로 그려내 듯 주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뭐가 유명했는데?” 

  “그럼, 별명은 생각나?” 기억 못 하는 나를 놀리 듯 그가 수수께끼 놀이를 이어 나갔다. 

  “글쎄.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명해질 거리가 있었는지 모르겠네. 기억 안 나는데.” 

  “달리기 정말 잘했잖아. 별명은 사이코고. 2학년 때 너, 나, 태호 그리고 몇 명이 수업 시간에 장난치다가 기합을 받은 적이 있었어. 담탱이가 몽둥이 같은 거 들고 교단에 딱 버티고 서서 뺑뺑이 시켰잖아. 그때부터 일이 터진 거지. 다른 애들이 운동장 몇 바퀴 돌다 거품 물고 쓰러지고 있을 때, 넌 미친놈처럼 배꼽 잡고 킥킥거리며 뛰었잖아.” 

  “내가? 웃었다고?” 

  “그래. 담탱이 당황하던 게 가관이었지. 애들이 그때부터 널 사이코라고 불렀잖아.”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주일은 내가 왜 웃었는지는 기억 못 하겠지. 그때 희한하게도 교단 위에 서 있던 담임의 말이 들려왔다. “구정물 튀어서 태어난 새끼들. 불량품 새끼들.” 그리고 그 말이 왜 그런지 정말 웃겼다.   

  주일이 중학교 시절을 얘기할 때면 나는 잃어버린 기억이 더 궁금했다. 술을 마시고 몇 시간만 필름이 끊겨도 당황하는데, 도대체  10년 이상의 기억이 공백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억상실증이 왜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어처구니없게도 큰 호수가 있는 공원에서 자전거들이 지나다니는 뿌연 잔상뿐이다.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그 얼떨떨함은 텅 빈 데이터베이스가 차곡차곡 채워지면서 사라져 갔고 기억이 포맷된 이유도 무덤덤하게 잊혀 갔다. 갑작스러운 주일의 말에 운동장을 뺑뺑이 돌며 힘 하나 들지 않았던 그 시절의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왜 뺑뺑이를 기합이라고 하는 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즐겁게 달리던 그 느낌이 생생했다. 


  “민아. 빅뉴스! 뉴스에는 아직 안 나온 사건인데 바닥이 좁아서 벌써 소문이 쫙 퍼졌다.” 그가 속삭이듯 얘기했다. 

  “뭔 사건?” 잃어버린 운동화가 떠올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외지 사람이 실종됐다는데. 감쪽같이.” 

  실종! 나는 순간 하얀 도화지 위에 중년 여자를 스케치하고 있었다. 그녀가 운동화 이름을 보고 찾아올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실종 사건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손가락으로 코 등을 비비며 주일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복산 등산로 입구에 모텔이 하나 있거든. 실종된 여자가 거기서 묵었나 봐. 방은 깨끗한데 희한하게 타고 온 차는 주차장에 그대로 있었다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목격자나 CCTV는?” 

  “그 모텔이 외진 데 있잖아. 사생활 보호 차원에 그 흔한 CCTV하나 안 달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면 객실로 바로 연결되고. 뭐 그러니 그 위치에 손님들이 많았겠지. 비밀의 정원 아니겠어?” 

  “비밀의 정원? 폼 나는데. 근데 너도 대단해. 어떻게 그런 걸 속속들이 알고 있냐?” 

  “그 모텔 카운트 보는 애가 가게 제빵사 아들이라서 들었지 뭐.”

  “아는 사람도 많네.” 

  “제빵사 말로는, 그 여자가 가끔 왔대. 나이는 좀 들어 보였어도 미인이라 아들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네. 객실 귀중품이 없어졌으면 금품 절도로 볼 수도 있을 텐데 아예 물건 자체가 없으니까 어이가 없는 거지. 차에도 황당하게 머리카락 하나 안 떨어져 있다는데. 그 애도 불려가서 조사를 많이 받았나 봐.” 

  “이상한 사건이네.” 

  “더 이상한 건 실종된 여자가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룸을 2개 예약했다는 거야. 그 모텔 7층은 펜트하우스거든. 룸이 딱 2개 밖에 없는데 그걸 모두.” 

  “뭐야. 모텔이 펜트하우스도 있나 보지?” 

  “돈 많은 사람은 모텔이라도 그런 방에 자고 싶나 보지. 아무튼 카운트 보는 애는 일행이 있으려니 생각했대. 동행인은 누군지, 어디 갔는지 전혀 모르나 봐. 실종 신고 자체도 없고.” 

  “희한하네. 펜트하우스라면 엄청나게 큰 방일 텐데 방이 따로 필요했다면 친구나 가족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 동행인 방도 똑같이 깨끗하다니까 기가 차지만.” 

  “차가 그대로 있다면 같이 실종된 거 아닐까? 동행인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직 모르고 있을 수 있잖아.” 

  “난 왠지 동행인이 범인 같은데. 필이 와.” 

  “우리 형사 같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새벽의 그 중년 여자가 사건과 연관된 건 아닐지,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내가 사건과 엮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1층에서 주일을 찾는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2층 테라스까지 올라왔다. 주일은 미안하다며 내 어깨를 살짝 만지고 황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그 여자를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운동화 이름쯤이야 별 의미도 없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남은 식빵을 뜯어 생크림에 찍어 오물거렸다. 담백하고 쫄깃한 식감이 느껴졌다. 책을 다시 펼쳤다. 달리기라.... 난 언제부터 달렸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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