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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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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07.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02

1

삼 개월 전, 나는 진료소 주변에서 길에 쓰러져 있는 노년의 남성을 발견하여 치료했다. 급성 미생물 감염으로 쓰러진, 온몸에 종양이 전이된 말기 폐암 환자였다. 사람을 살리는 직업을 배정받은 이들 ( 세 번째로 똑똑한 사람들 ) 은 정부가 운영하는 의술원에 속한 대다수와 나처럼 개인 진료소를 차리는 나머지로 나뉘었는데, 그의 병은 의술원은커녕 세상 어디에서도 완전히 낫게 할 수 없는 단계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애초에 의술원과 개인 진료소는 그 규모가 달랐을 뿐,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웠으니.


그럼에도, 나의 처치가 없었더라면 그 남자는 미생물 감염으로 쓰러진 자리에서 죽었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치료가 끝나고 한나절도 더 지나 눈을 뜬 그는 나를 생명의 은인 쯤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내가 자신을 살렸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의미에 불과했으며, 안도나 고마움 등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삶에 미련이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의 이러한 추측은 어림짐작에 가까웠으나 근거가 부족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그는 남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남들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는데, 정신을 차린 그가 내게 요청한 바는 고통 없이 즐길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시간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환자들이 죽음을 최대한 늦춰달라고 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의 반응은 꽤 이질적이었다. 그는 그동안 관찰한 대부분의 환자들처럼 악착같이 삶을 붙잡고 늘어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진료소를 다시 찾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고통스럽게 살 바에는 당장 편한 죽음을 택할 터였다. 그가 원하는 건 적절한 약물 복용만으로 늘릴 수 있는 만큼 늘린 삶을 충분히 즐기는 것뿐이었다.


고백하건대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는 출처 불명의 거금을 대가로 지불하겠다고 했고, 나로서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삼 개월 분의 약을 처방했다. 꾸준히 복용한다면 그가 육 개월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이미 이례적으로 긴 기간의 처방이었으므로 한 번 정도는 진료소를 다시 찾으라고 요청했다. 예상과 달리 그는 큰 저항 없이 처방을 받아들였다. 그의 상태는 나아질 희망을 가질 수 없었으나, 그가 운이 좋다면 삼 개월 뒤 그를 다시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짧고 형식적인 인사를 남긴 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던 큰 보폭으로 발을 옮겼다. 진료소의 옅은 진동으로 남은 저음의 목소리가 꽤나 미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그의 약이 바닥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아마 그는 삼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약을 매일같이 챙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꾸준히 복용했음에도 단지 운이 나빴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니라면, 다른 진료소를 찾아 새 약을 처방받았거나, 이제는 삶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졌을 수도 있었다. 그를 생각하면, 대단한 감정이 샘솟지는 않았으나, 원인 모를 심장의 떨림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그것은 대부분 빠르게 잦아들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가 약을 들고 떠난 지 정확히 보름이 지나는 날의 밤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던 보름달이 어딘가 원의 형태를 벗어나 찌그러져 있다고 생각하던 중에, 일을 마지막으로 마친 직원이 진료소 앞으로 도착한 택배가 있다는 말과 함께 퇴근했다. 이왕이면 그것을 전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푸념 섞인 생각을 하며 택배를 들여왔다.


발송인이 적히지 않은 채 덩그러니 놓인 택배는 진료소 책상의 반의 반 정도를 차지할 크기의 상자 하나와, 얇지 않은 종이가 끼워진 문서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깔끔히 포장된 상자에 날파리 몇 마리가 번갈아가며 붙은 것은 상자에 스며든 오묘한 향 때문인 듯 했다. 진료소에 벌레가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누구도 내게 문서철과 상자가 같은 사람으로부터 보내졌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나 진료소로 익명의 택배가 오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생각은 그리 흘렀다. 문서철의 포장을 먼저 뜯어냈다. 상자에서 감각한 것과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찌른 동시에, 문서의 내용을 열어보기도 전에 택배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보름 전의 그 남성이었다 . 그가 진료소를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발생한 바로 그 후각 자극이라고 흥분한 신경 세포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택배를 보낸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놀라지는 않았다. 상자나 문서에 대해 각별한 호기심 등의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단순히 받았으니 열어봤을 뿐인 문서는 보기와 달리 열 장 가량으로 길지 않았다. 손상되지 않도록 두꺼운 종이에 인쇄되어 두꺼워 보인 것 같았다. 첫째 장에는 굵은 글씨로 두 줄을 가득 채운 제목 밑으로 평균 삼 분의 일 페이지를 차지하는 문단들이 이어졌다. 


주사위의 해석이 시사하는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외계의 문자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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