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비강에 콧물이 가득했다. 휴지를 풀어 볼 터치하듯 코를 찍어냈다. 도서관에서는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만 들렸다. 시원하게 풀고 싶어도 눈치가 보였다. 집중이 되지 않아 책을 덮고 엎드렸다. 손등에 콧물이 흘러내려 흠칫 놀랐다. 휴지를 돌돌 말아 코에 집어넣었다. 멍멍한 의식을 뚫고 두 문장이 생성됐다.
‘망할 에어컨. 아니, 망할 남편이네.’
필리핀 어학원은 어딜 가든 시원했다. 그렇다고 감기에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룸메이트였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남편은 방을 냉장고처럼 만들었다. 추운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게 가장 편하게 잘 수 있다나, 뭐라나. 덕분에 나는 이 꼴이었다. 오늘이야말로 온도를 높여야지. 아니, 아예 꺼버려야겠어. 남편을 생각하면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도대체 이 화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결혼 전 반지를 맞추러 범일동에 갔다. 예물 거리로 유명한 동네라 귀금속 상점이 즐비했다. 예비 남편이 예약한 가게에서 반지 크기를 맞췄다. 친절한 계약을 마무리하고 지하철로 달려갔다. 두 정거장만 지나면 부산의 대표 번화가인 서면이 나온다. 미리 알아 둔 유학원에서 줄지은 상담사 중 한 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괜한 긴장감에 두 손을 꼭 잡았다.
몰디브나 하와이 대신 선택한 신혼여행지는 세부였다. 단기 신혼여행 비용이면 필리핀 어학원에서 3개월은 지낼 수 있었다. 호주로 떠나기 전, 영어 공부를 미리 해두기에도 딱 좋았다.
“트윈룸에 3식 제공하고 세탁 서비스는 주 2회예요. 당연히 1대 1 수업이고 어학원 안에 기숙사가 있어 안전해요. 인터넷도 빵빵하고요.”
손짓발짓 현란한 상담사의 추천에 의논해 보겠다며 학원을 나섰다. 햇빛 가득한 도심의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페로 들어갈 것도 없이 길거리에서 결정이 났다. 집도 없고 주머니도 가벼운 신혼부부에게는 더없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여러 곳 들릴 것 없이 당시 가장 유명했던 유학원의 신용에 기대기로 했다.
결심을 전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수화기 너머로 상담사의 “앗싸!” 하는 외침이 들렸다. 2인분의 수당을 받게 되어 기뻐서겠지만, 어쩐지 사기당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머리를 흔들며 좋은 점만 생각했다. 현지 사무실에서 신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특전이 떠올랐다.
‘공짜 컵라면이라니, 해외에서 얼마나 매운 게 먹고 싶겠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찝찝했던 예감과 바꾼 한국 라면은 떠날 때까지 먹을 기회가 없었다.
“나 좀 나갔다가 올게.”
새신랑은 노느라 신이 났다. 공부에는 당최 관심이 없었다. 본인도 진급을 위해 영어 실력을 쌓아야 한다더니. 남편은 어학원에서 만난 형들과 맞담배 피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신혼 분위기 내보겠다고 스파르타식 학원을 피한 결과였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세부 시내를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어이가 없었다. 나 소박맞은 건가. 일본에서의 악몽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싸운 이유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의논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랬다면 결혼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했으면 좋았을 텐데, 집중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높은 하늘과 푸르른 야자수, 깨끗한 수영장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완벽하게 놀지도, 진득하게 공부하지도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시간은 느릿느릿 이별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 밥 맛없어. 우리 밖에 나가서 먹자.”
사람 좋아하는 남편은 여기서도 다 같이 밥 먹는 걸 좋아했다.
‘돈은 뭐 하러 내고 왔니. 어학원에 기부하러 왔니.’
삼시 세끼 차려주는 식당 밥이 아까웠다. 맛도 나쁘지 않았다. 붕 뜨는 마음을 잡고 싶었지만,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노느라 바빴다. 그 속에서 오로지 나만 섞이지 못하고 물속 기름처럼 붕 떠 있었다.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해도 통하지 않았다. 일본의 단칸방에서처럼 우리는 다시 갈등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사람을 좋아할수록 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됐다. 바닥을 장식했던 촛불이 이번에는 거대한 대포알이 되어 날아왔다. 홀로 방공호에 꼭꼭 숨어 안 외워지는 영어단어를 중얼거렸다.
일본에서의 시간은 가랑비처럼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일단 선을 그었다. 상대의 본심 또한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웃고, 얘기하는 관계에 만족하고 싶은데, 남편은 꼭 상대의 마음에 풍덩 빠지고 싶어 했다. 좋게 말하면 정이 많고 나쁘게 말하면 맘이 헤펐다. 결국에는 상처받고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당해놓고 정신을 못 차리네. 내 말 안 들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봐라.’
탐탁잖은 시선이 상대를 향했다. 신혼 초기의 힘겨루기는 깊은 골을 만들었다. 하지만 관계의 균열은 우연한 사고로 봉합되었다. 계기는 남편의 요구였다. 같이 다니는 형들과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싶다 말을 전해 왔다.
“그럴 돈이 남아있어?”
“내가 돈 계산이 얼마나 철저한데. 있어. 나만 믿어.”
그 말만 믿고 중급 자격증까지 땄다. 평소에는 바다라면 지긋지긋하다던 놈이 좋아하는 형이 생기자, 행동이 달라졌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바다는 죄가 없었다. 에메랄드빛 수면 아래에는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물고기가 살랑거렸다. 선녀 옷을 연상시키는 열대어의 지느러미는 아무리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바다로 들어가는구나. 남편의 성화에 마지못해 시작한 스쿠버다이빙은 매력적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의 투어를 끝내고 고래상어를 보러 갔다.
평소처럼 잠수복에 산소탱크를 걸치고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다. 순간, 어찌 된 영문인지 눈을 뜰 수 없었다. 캄캄한 눈앞에 손발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알고 보니 물안경이 날아간 것이다. 허둥대는 나를 코치 선생님이 구했다. 함께 수영하는 멤버가 물안경을 대신 찾아줬다. 수면에 둥둥 떠서 마음을 다잡아도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아.’
아름다웠던 바다가 시커먼 구덩이처럼 보였다.
“선생님,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저, 못 하겠어요.”
“아이고. 그러면 다 같이 철수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질색이었다. 선생님의 그 말씀 한 번에 심장 박동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심리는 육체를 지배했다. 몇 번의 심호흡을 끝으로 다시 잠수를 시작했다. 물밑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무사히 할당된 시간 동안 다이빙을 즐기고 나왔다.
배에 올라타자, 장비를 벗은 남편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낯빛이 하얬다. 평소의 높은 텐션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 바닥의 철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레 다가갔다.
“왜 그래? 왜 그러고 있어?”
“모르겠어. 갑자기 물에 못 들어가겠어.”
파도에 삼켜진 아내의 모습은 공포였을까. 나는 물속에서, 그는 물 위에서 같은 악몽을 마주했다. 그제야 눈앞의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실감이 났다. 남편이 승선 후 매일 견뎌온 풍경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도. 남편은 그 후로 다이빙을 하지 못했다.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본능이었다. 티를 내면 도드라질까 봐 일부러 말을 삼켰다. 해면을 닮은 그의 마음을 묵묵히 위로했다.
결국, 여유가 있다던 자금은 바닥을 보였다. 우리는 남은 기간 얌전히 식당 밥을 먹고 수업을 들었다. 다시금 임기응변식 해결에 몸을 맡겼다. 너는 배로, 나는 호주로 떠날 시간이었다. 갇혀 있던 수조를 열자, 눈앞은 바다였다. 먹이는 받아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냥하는 것이었다. 다른 속도로 수영하던 남편은 자리로 돌아와 스타트 라인에 섰다.
‘다음에 만날 때는 근사한 저녁을 함께해야지.’
줄기차게 싸울 땐 언제고 다시금 눈물 바람이었다. 아쉬움을 머금고 공항에서 헤어졌다. 우리는 늘 그렇게 북을 치고 장구를 쳤다. 사랑이란 맞춰가는 공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