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오케이, 땡큐
이렇게 유부녀가 되는 건가.
덜컥 결혼을 약속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남자는 바다에서 스패너를, 여자는 타국에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남자 친구의 휴가가 가까워져서야 다시금 결혼 얘기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회사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러게. 지진만 아니었어도 고민 안 할 텐데.”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낫겠지?”
“흠. 좀 더 고민해 볼게.”
어느새 일본에서 일한 지도 3년이 가까워졌다. 회사에서 받은 정직원의 지위와 비자는, 섣불리 내려놓기엔 아까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방사능의 위협은 여전했고, 변함없는 업무에 슬며시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취업에 성공한 일본 생활은 하나의 모범 사례였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콤플렉스였던 언어 실력을 극복하고 싶어, 영어권 비자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코알라와 캥거루로 유명한 호주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가고 싶은 나라마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상사에게 퇴사 의사를 전했다. 아쉬워하는 얼굴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했다. 귀국까지 한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 먼저 배에서 내린 남편은 친정 근처에 고시원을 빌렸다. 때마침 벡스코에서 결혼박람회가 열렸다. 예비 남편은 혼자서 참석하겠노라, 의사를 전해왔다.
그는 용감한 돈키호테였다. 예비 신부와 신랑이 활개 치는 그곳을 홀로 돌아다녔다. 나라면 못 할 짓이었다. 엄지를 들어 올린 이모티콘을 스무 개쯤 전송했다. 어차피 우리에게 까다로운 조건은 없었다. 나에게 결혼식이란 껍질을 깐 삶은 달걀 같았다. 뽀얗고 예쁘지만, 맹맹하고 텁텁한 그런 행사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해볼게.”
남자 친구는 하루 만에 식장과 드레스, 메이크업, 스튜디오 사진까지 일사천리로 계약을 끝냈다. 예단, 예물 등 웬만한 건 다 생략했다. 결혼반지만 맞춰서 같이 끼기로 했다. 부모님의 양복이나 한복도 각자 빌리는, 참으로 경제적인 결혼식이었다. 혼인 후 남편은 배를, 나는 호주로 각자의 길을 또다시 걸어갈 예정이었다. 뭐든 사면 짐이라는 생각에 아낌없이 포기했다.
회사 송별회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감춰두었던 기억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실패한 프러포즈가 떠오르자,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 할머니가 괜찮냐고 물었다. 아임 오케이. 땡큐였다.
결혼식을 앞두고 나는 처음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생애 최저 몸무게에 기뻐하며 피부관리를 받았다. 다른 건 포기해도 아름다운 신부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남자 친구는 고시원을 나와서 함께 지낼 단기 원룸을 빌렸다. 앞으로의 기대가 좁은 집을 가득 채웠다.
두근거렸던 상견례도 무사히 끝이 났다. 남자 친구나 나나, 내놓은 자식처럼 자신의 길을 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혼 전 부모님의 반대 같은 드라마는 없었다. 가장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던 친정 아빠는 다행히 남자 친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기관장 되면 월에 얼마 버는 줄 아나. 적어도 밥 굶을 일은 없을 거다.”
약주에 취해 비틀거리던 아빠가 나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기관사라는 직업은 어른들에게는 든든한 무기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속이 뜨끈해졌다. 나도 모르게 맘속 다짐을 전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잘살게요.”
사람 일은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했던가.
예측하지 못한 갈등이 일어난 건 결혼하기 한 달 전이었다. 남자 친구 부모님의 이혼 소식이 부나방처럼 날아들었다. 떨어져 사신 지 오래되신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굳이 이 타이밍에 헤어지시다니. 남자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홀로 펜션을 운영하시던 예비 시아버님은 이별을 계기로 사업을 접으셨다. 원래 요리사셨던 그는 새로운 창업을 생각하고 계셨다. 목돈이 필요했다.
“아버지한테 돈을 좀 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전화를 끊고 온 남자 친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예비 남편의 가족은 필요하면 가족끼리 쉽게 돈을 주고받았다. 우리 집은 자매 사이에도 돈거래를 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가 가족의 전화를 받고 나면 종종 돈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내 돈이 아니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우리는 결혼해서 하나의 가정을 이룰 참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돈 빌려드릴 거야?”
“그래도 난 장남이잖아. 어떻게 모른척해.”
“장남이라고 받은 것도 없잖아. 우리도 이제 집 사고 하려면 돈을 모아야지.”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릴게. 축의금도 도움이 되실 거야. 아버지 혼자서 펜션 운영을 계속하시는 건 무리잖아.”
남자 친구는 3년 넘게 배를 타며 모았던 돈을 대부분 부모님 빚을 갚는 데 썼다. 쓴소리는 했지만, 어차피 남은 돈도 남자 친구가 힘들게 배를 타며 모은 돈이었다. 그 돈을 쓰라, 말라 할 권리는 아직 나에게 없어 보였다.
결국,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효도를 하기를 했다. 모아놓은 돈 중에서 천만 원씩을 양가 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다. 통장을 비운 만큼 홀가분했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선물 한 번 드린 적이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당장 채울 집이며 세간이 없었기에 할 수 있던 결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코가 석 자였다. 나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어 식을 올렸다. 결혼식 전날 밤은 친정집에서 함께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옆에 누운 남자가 최선인가.’하는 복잡한 마음보다는 큰 행사를 목전에 둔 MC 같은 기분이었다. 함께 부를 축가와 살찌기 전에 고른 웨딩드레스 등 자잘한 걱정을 뒤로한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내 옆에는 반송장처럼 보이는 사내가 누워있었다. 미혼남에서 기혼남이 되는 충격에서였는지, 옆에서 코 고는 여자와의 일평생이 후회돼서인 건지. 그는 정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 밑에 내려온 다크서클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밑까지 내려왔다. 폐백 때는 포토샵으로도 고치지 못한 검은 눈덩이를 앨범에 남기고 말았다.
“이제 신랑, 신부가 새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후배 님은 칼을 높이 들어 항해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랑, 신부의 행복한 항해를 위하여-!”
그나마 우리의 결혼식을 눈부시게 만들어준 건 예도였다. 남자 친구의 학교 후배들이 하얀 제복을 입고 등장했다.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 금색 줄의 견장이 버진로드의 양쪽에 서서 의식용 칼을 교차시켰다. 우리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아치를 함께 통과했다. 사랑의 결말이라 생각했던 결혼은, 실은 또 다른 운항의 시작이었다.
시식때 괜찮다고 말했던 뷔페는 맛이 없었고, 남편은 판다가 되었고, 꿈꿨던 스몰웨딩과는 거리가 먼 결혼식이었다. '이걸로 우리가 부부가 된 건가.' 하고 의심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고 보니 알겠다. 이것보다 더 긴 결혼식은 무리라는 것을. 끊임없이 웃어야 했던 입가에는 경련이 일고, 남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병자 꼴을 하고 있었다. 2시간의 예식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지쳐버렸다. 뻥튀기 같은 혼례식은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고효율 이벤트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말았다.
비행기 탑승까지 시간이 남아, 우리는 엄마 집으로 돌아갔다. 식장을 장식했던 거대한 액자사진까지 손수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몇 겹이나 바른 화장을 북북 지우고 나란히 누워서 낮잠을 청했다. 둘 다 폭풍 휴식을 취하고 비몽사몽간에 공항으로 달려갔다. 긴 비행기 시간 때문에 편한 복장에 민낯이었는데, 머리만은 헤어숍에서 신경 써준 디스코 머리였다. 수많은 실핀을 하나씩 뽑으며 땋은 머리를 풀고 싶었지만, 뿌려놓은 헤어스프레이에 뒷머리는 잔뜩 떡이 져 있었다.
남자 친구에서 남편이 되어버린 그 또한 피로에 잔뜩 절어있었다. 이것이 진정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란 말이지. 우리는 신선도가 떨어진 생선 같은 몰골을 하고서 사이좋게 세부행 비행기에 올랐다.
되돌아본 결혼식은 심심했지만, 심심하지 않았다. 너와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잔칫날이었다. 그리고 잔치 뒤에는 뒤로 미룬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것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다음 잔치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