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선의 시작
아이가 분수토를 했다. 걸쭉한 분유가 바닥을 적셨다. 젖병을 가져다준 남편이 아연실색했다. 약을 탄 젖병이었다. 봇짐 같은 아이를 어깨에 걸치고 등을 두드렸다.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였다.
“어떡해, 어떡해, 다시 타야 해.”
남편이 서둘러 분유를 다시 탔다. 토를 하고 난 뒤라 아기가 좀처럼 먹지를 못했다. 먹이다가 트림시키고, 또 먹였다. 젖병이 바닥을 보였을 때는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부모가 되는 건 쉬웠지만, 육아는 치열한 전투였다. 정부에서 지원해 준 산후조리사 할머니가 유일한 구원자였다. 젖병소독기 위치부터 신생아를 씻는 법까지 손수 가르쳐 주셨다. 초짜 부모는 어미 뒤를 쫓는 병아리처럼 어르신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아기가 처음으로 해맑은 미소를 보여줬던 날의 환호가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동그란 목 튜브를 하고 올챙이처럼 헤엄치는 모습도 남편과 함께 봤다. 설소대에 문제가 생겨 병원을 방문했을 때도, 조그만 손등에서 새빨간 피를 뽑아냈을 때도, 목청껏 우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을 때도 옆에는 남편이 있었다.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어 진심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임신했을 때의 서운함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나 이제 배 안 탈 거야.”
그러니 남편의 느닷없는 선언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자음 하나, 모음 하나가 일상을 위협하는 도끼처럼 다가왔다. 곤히 잠든 아기를 방에 두고 터덜터덜 기어 나온 거실이었다. 소파에 기대 초점 없는 시선을 멀리한 채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이제 배 안 탄다고.”
“그럼, 뭐 할 건데.”
“인천에 올라가서 아빠 식당 일 도울 거야.”
오후의 나른함이 와장창 깨졌다. 갑자기 인천이라니. 아무런 예고도, 의논도 없는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입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억누른 고성을 주고받았다. 시아버지와 힘을 합쳐 열심히 장사를 하겠다고, 잘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남편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혼자서만 그린 희망찬 미래에 나와 아이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 귀가 계속 아프단 말이야.”
팽팽한 대치는 마지막 한 마디에 KO패 당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떠들던 선상의 미래는 허상이었다. ‘그럼, 내가 일을 할게. 네가 육아를 맡아.’라고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입지가 처량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져도 배를 탔던 남편보다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었다. 태어난 지 삼 개월도 안 된 아기를 두고 일을 나갈 자신도 없었다. 자존감이 사정없이 깎여나갔다. 아기를 볼모로 잡힌 기분이었다.
남편은 인천에 전셋집을 구했다. 벽지를 새로 바른 방 두 칸은 희뿌옇고 서늘했다. 아기와 내가 일주일씩 머물게 될 반지하방이었다. 전등을 끄면 풀 냄새가 더 짙어졌다. 허망한 마음을 중고로 산 아기용품으로 채워 넣었다. 참견 많은 앞집 할아버지는 마주칠 때마다 집 안을 흘끔거렸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비굴하게 웃었다.
꿈같던 우리 집은 다대포에 그대로 있었다. ‘식당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완전히 올라가지 않는다.’ 그게 내가 내건 유일한 조건이었다. 남편은 이 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밤에 고속도로를 달려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루가 지난 일요일 저녁이면 자는 아이와 나를 태우고 다시 인천으로 올라갔다.
다섯 시간의 드라이브는 징그러웠다. 정승이 되어 그 자리에 말뚝을 박고 싶었다. 현실을 외면하니 잠만 쏟아졌다. 남편은 어서 자라며 나를 다독였다. 심야의 고속도로는 음 소거 버튼을 누른 듯 고요했다. 몰려오는 졸음에 스스로 뺨을 때리는 그를 모른척했다. 이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왔니?”
“네, 안녕하셨어요.”
시끄러운 점심시간을 피해 가게로 향했다. 새로 생긴 시어머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는 두 분은 몹시 수척했다. 옆에서 생기를 가장하는 남편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시아버지의 식당은 조그마했다. 자리가 적다 보니 주 수입은 점심시간 도시락이었다. 새 시어머니가 주위 회사를 돌며 가게를 홍보한 덕에 단골이 많았다. 일이 늘어갈수록 쉬는 시간은 없어졌다. 주 6일 일하고, 일요일에는 재료 손질을 했다. 휴일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남편은 아이가 잠든 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가게에서 가져왔다며 비빔밥 재료를 주섬주섬 꺼냈다. 의욕에 찬 남편이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금방 맛있게 만들어줄게.”
가스레인지에 파란색 불꽃이 돋았다. 그는 능숙하게 돌솥 안에 밥과 나물을 정렬했다. 눌은밥이 적당히 생기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고소한 참기름을 뿌리고 달걀부침까지 올렸다. 따뜻할 때 먹으라며 가져온 그릇에는 정성이 담겨있었다. 맛이 너무 좋아 목이 멨다.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 보였다. 이 남자는 어떻게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나. 조도를 낮춘 방에서 밥과 함께 울음을 삼켰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아기를 등에 업고 가게를 오갔다. 아이가 태어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편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평상 위에 이것저것 짐을 내려놓았다. 잠깐의 외출에도 가방은 늘 바위처럼 무거웠다.
돌이라고 큰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기는 서운해서 누워있는 시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아이가 오늘 생일이에요.”
“오, 그래? 축하한다.”
“케이크라도 하나 사 올까요?”
“아휴, 됐다, 뭐 하러.”
TV에 시선을 둔 시아버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마 자신들은 케이크를 먹지 않아 필요 없다는 뜻이겠지. 케이크를 사봤자 정작 주인공인 아기는 먹지도 못했다. 식당에서 케이크를 퍼먹을 정도로 내가 단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없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목구멍이 모래를 흘려넣은 듯 서걱거렸다.
일주일이 지나면 남편과 헤어졌다. 배를 타지 않았는데도 우리 가족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KTX로 성인 한 자리 승차권만 끊었다. 아기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무료였다.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짐과 아기 사이로 몸이 끼어 오도 가도 못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면 터질 것 같은 방광을 누르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시원한 배출은 내가 고향에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부산역은 혼잡했다. 고향을 찾는 사람, 고향을 등지는 사람, 부산이 처음인 사람, 부산이 익숙한 사람. 뒤편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마중을 나왔다. 곤히 잠든 아이의 포동포동한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나를 똑 빼닮은 얼굴에서 남편의 흔적은 희미했다. 그것마저 괜히 서글펐다.
“괜찮아. 다시 만날 수 있어.”
우리는 가족이니까.
인파에 휩쓸린 다리에 힘을 줬다. 눈가에 수분이 서서히 증발했다.
'바닥까지 드러내고 말려야지. 소금기까지 탈탈 털어서.'
항구에 정박한 철판이 녹슬지 않도록, 육지에 오른 배가 건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