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날 아침은 말끔히 개어늦가을 하늘은 눈이 부셨다. 포장이사 인부들은 펼쳐놓은 단프라 박스에 짐을 챙겨 넣고 단단히봉했다. 거실 중앙에 쌓인 파란색 박스더미가 지나온 날들의 흔적 같아 괜스레 마음이 찡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고단한 일정은 오후 늦게서야 끝이났다. 상자로 둘러싸인 방을 보면 한숨이 나오면서도 큰일을 끝낸 마음에 홀가분했다. 이삿날이 되어서야 새 집에 처음 와 본아이는 선물상자를 연 것처럼흥분해서 소리쳤다.
엄마! 화장실이 두 개예요!
아이의 환호에 별 일 아니라는 듯 호응했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감출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새 아파트를 구경하러 밖으로 나갔다. 로고가 박힌 커다란 정문, 주차차단기가 있는 후문,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단지 내 바른 길, 초록으로 정비된 화단과 분수대, 투명창 너머로 보이는 피트니스 센터. 이 모든 곳이 우리 가족의 쉼터가 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커다란 만족감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에서 시작될 새로운 일상이 더없이기다려졌다.
우리는 새 보금자리에서 겨울을 보냈다. 따뜻한 봄이 오자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 앞 도로는 근처에 있는 공장 때문에 큰 트럭과 공사차량이 자주 지나다녔다. 위험한 등굣길을 피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셔틀버스를 운영했다. 덕분에 매일 차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 호사를 누렸다.몸은 편한데 마음은 어떨까. 조심성 많은 아이가 새 학교에서 잘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성적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를 사귀는 게 서툴렀다. 모르는 아이가 다가오면 자리를 피하고 엄마만 찾았다. '아직 어려서 그래. 점점 좋아지겠지.'하고 낙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6살이 돼서 걸려 온 학부모 상담 전화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OO 이는 규칙을 잘 지키고 수업시간에도 곧잘 따라 해요.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조금 힘들어해요.
어린이집에서 친구랑 노는 건 2할뿐, 나머지 8할은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하는데 쓴다고 했다. 친구보다는 어른을 좋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선생님 옆에서 보낸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또래 아이들의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아이는 그게 곤란했나 싶다. 안정을 중요시 여기는 아들은 처음 가는 장소를 두려워했고 낯선 사람을 힘들어했다.
함께 그네를 타고 놀던 어느 날이었다. 살갑게 다가오는 여자아이를 피해 전속력으로 놀이터를 빠져나가는 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유치원 친구를 수소문해 집으로 초대했다.친구들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과는 엄마의 좌절로 이어졌다. 아이의 성장은 더뎌서 '이렇게 사회성이 부족해서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지?'하고 초보엄마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지치지 않고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의 그룹수업을 늘렸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밖으로 나가 다양한 행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 사람과 부딪히고 깨져봐야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가 7살이 되자 거짓말처럼 또래 친구들과의 교류가 늘었다. 아들은 자신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데 성질 급한 엄마는 그걸 믿어주지 못한 것 같아 돌이켜보면 미안했다. 그래도 여전히 엄마랑 노는 걸 제일 좋아했다.1학년이 돼서도 방과 후 수업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노는 것보다 집에서 엄마랑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얌전하고 착한 아들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놀이에 매번 맞춰주는 건 한계가 있었다.방귀와 똥과 오줌 이야기만 하다 보면 어른과의 커피타임이 절실해졌다. 거기다 방이 어지러워지는 게 싫었던 엄마는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도서관 수업을 자주 신청했다. 책을 읽다가 집 근처 체육센터에서 수영을 배우고 돌아오면 어느새 저녁시간이었다.요즘 초등학생은 어른보다 바쁘다더니 그건 다 부모의 흉계였다. 사춘기가 오면 사그라질은밀한 계획이지만 그전까지는 이렇게 버텨보자며 혼자서 수군거렸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남편은 바다로 떠났다가 시원한가을이 되자 둥지로 돌아왔다. 수평이 맞지 않아 붕 떠있는 마음 밑에 받침대를 괸 것같았다. 혹자는 기관사 남편을 둔 나를 보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며 부러워했다.하지만 7, 8개월을떨어져 있다가 2, 3개월 동안 줄곧 얼굴을 마주하면 다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육아에 있어 의견차가 커서 초반에는 많이도 싸웠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은 소중해서 그가 배를 타고 나가면 언제 돌아오나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 역시 아빠가 집에 있고 없고에 따라 느끼는 안정감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남편이 외출한 어느 날이었다.아이와 둘이서만짐을 챙겨 수영교실에다녀왔다. 배고플 아이를 위해 서둘러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집에 돌아온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세대현관에서 호출신호가 옵니다.’익숙지 않은 멘트가거실에 울려 퍼졌다. 택배는 문 앞에 두고 가고 연락 없이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순간, 이유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칭칭 휘감았다. 당황한 마음에 잡고 있던 젓가락을 그대로 든 채 인터폰 속 화면을 응시했다. 스크린에는 처음 보는 초로의 여자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라는 내 물음에 여자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