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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24. 2024

잠깐의 행복

 그 후로 아파트를 나갈 때까지 그녀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내지르는 고성은 여전해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미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들과 함께 밖을 걸을 때는 좀 더 조심했다. 사연 많은 그곳에서 아이는 유치원을 졸업했다.

 집 계약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서 배를 내린 남편은 좀 더 넓은 으로 이사하기를 원했. 근처 초등학교는 차가 다니는 길을 멀리 걸어가야 했기에 이사는 불가피했다. 엄마집과 멀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같은 지역구 안에 거처를 구하면 자주 볼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새로운 주거지를 찾는 과정은 귀찮았지만 즐거운 마음이 더 컸다.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그게 다 내 것인 양 신이 났다. '이 집은 거실이 넓어서 책방처럼 꾸며도 좋겠네.', '여기는 욕조를 매립형으로 바꿨구나. 반신욕 하기 딱인걸.', '베란다가 이렇게 넓은 곳이 아직도 있구나. 옛날 집이라서 그런가?'등등 상상 속 집들이는 끝이 없었다. 거기다 부동산을 지날 때면 시세가 궁금해 기웃거리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아서 가격이 좋은 곳은 위치가 안 좋고, 위치가 좋은 곳은 가격이 비쌌다. 전을 못하는 뚜벅이라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은 피하고 싶은 주제에, 예전보다 좁은 집은 사양하고 싶었다. 괜찮은 거처를 구하려면 이제 꿈에서 빠져나와 현실과 마주할 때였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나보다 씬 이성적이었다.

 안동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는 90년대 외환위기로 부모님 사업이 망한 후 힘든 시절을 겪었다. 난방이 안 되는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네 가족이 이불 하나로 새우잠을 잤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몇 번이나 계속된 이사로 중학교 제적당할 뻔했는데, 전해 들은 전학 횟수만 5번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방학 때는 돌아갈 집이 없어 교회 동아리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런데 직업마저 바다를 떠도는 기관사라니 하늘도 참 무심한 것 같았다. 

 "역마살 있는 사람끼리 잘 만났네." 하며 남편의 등을 두드렸다. 편히 쉴 곳을 찾아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안쓰러웠다. 그래서였을까? 남편은 누구보다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얼른 돈을 벌어서 우리만의 보금자를 마련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을 열렬히 응원했다.     

 초등학교가 근처에 있고 가격이 적당하며 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깨끗한 아파트. 우리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아파트는 사실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곳은 근처에 제철공장이 있어 브랜드 아파트 치고 가격이 저렴했다. 철강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분진이 문제는데, 농도가 기준치보다 높으면 주민조사단에서 즉각 신고를 한다고 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축 아파트는 무척이나 깨끗해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미세먼지는 공기청정기에게 맡기면 된다며 남편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끔한 인상의 중개업자와 약속을 정하고 여러 집을 방문했다. 모두 같은 구조로 만들어졌을 텐데도 저마다 집주인의 개성이 묻어나는 점이 신기했다. 노부부의 거처는 고풍스러운 안티크 물건들로 가득했고, 반려인의 쉼터는 창가에 설치된 캣타워에서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생기 넘치는 식물들 사이로 앙증맞은 다육이가 인상적이었던 식물애호가의 공간도 있었다. 어떤 집을 방문해도 느낌이 좋았다. 잘 정돈된 집은 나도 여기서 살아보싶다는 마음을 솔솔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보러 간 집에는 어린 꼬마와 할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천장이랑 바닥에 몰딩을 했네요. 가스레인지 뒷면에 검게 코팅된 거 보이시죠? 이렇게 하면 기름이 튀어도 눈에 잘 띄지 않죠. 화장실에 줄눈시공 다 했고.. 여기는 수납장도 확장해 놨네."


 노련한 중개업자는 능숙한 시선으로 그 집만의 특징을 쏙쏙 뽑아 설명해 주셨다. 인자한 집주인은 넓은 아량으로 흔쾌히 전세금을 깎아주셔서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 집을 계약했다. 이사하기 전에 장난감을 정리해야지. 베이지색 가구로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야지. 휴대폰 갤러리에 인테리어 폴더를 만들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발견하면 기뻐하며 저장했다. 침대에 누워서 남편과 함께 실내장식에 관한 책을 볼 때면 마치 신혼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기대가 가을바람에 실린 연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선택이 다가악몽의 서막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이삿날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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