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시금석이 되는 아이
“타자는 나에게 도래하는 것, 내 자아의 동심원을 깨뜨리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중에서
우리는 대부분 5세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간혹 몇몇 장면의 인상 깊은 기억이 전부일 것이고 그것도 확실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 이유는 기억의 형성과 저장을 담당하는 해마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시기이기도 하고, 기억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언어발달이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5세 이전에는 기억보다 감정과 정서, 감각으로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체득하고 저장한다. 바꿔 말하면 어떤 장면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없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들로 가득한 시기이다. 그런 ‘정동적 기억’은 이후의 정서와 가치관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 영유아기의 돌봄에 집중하다 보면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5세 이전 시기에 대해 되짚어 볼 수 있게 된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 특히 부모님에게 들은 말로 그 시절의 기억을 채워 넣기도 하고, 가끔 들여다보는 썸네일 같은 사진 몇 장으로 한 시절 전체를 미화하기도 한다.
가장 희미하지만 가장 섬세한 시절의 보석이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았을까. 무엇이든 유심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던 보석이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을 부지런히 따라 하는데 열중했다. 핸디청소기를 들고 청소한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 뒷짐 지고 걷는 할아버지를 따라 하기도 했다. 싱크대에서 냄비를 꺼내 모자처럼 써보는 것은 기본이고, 사용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물건을 뜯어보고 풀어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불편한 것만 빼고 모든 행동을 모방하는 무조건적인 따라쟁이를 보니 애들 보는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이런 자발적이고도 충만한 학습능력은 몇 가지 요건이 맞아떨어진 상태에서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학습능력은 생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자유롭게 모방을 통해 행동양식을 배우게 되는데 그 공동체가 안정되지 못하거나 불안한 상태라면 순수한 호기심에 의한 학습에 방해를 받게 된다.
어린 시절, 화목한 가정이라는 것은 TV드라마 속에나 있는 줄로만 알았던 기억 때문인지 내가 속한 핵가족 공동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자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을 흔하게 겪을 수 있는 도시에서 성장했던 터라 물질적 결핍감과 함께 정서적 불안감이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의 작은 실수로 누군가에게 어마어마한 손해를 끼쳐서 배상을 청구하러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밤 아홉 시만 되면 어김없이 불이 꺼지는 창 없는 단칸방의 어둠 속에서 자각몽을 오가며 꾸었던 많은 불안한 꿈, 그리고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우는 법을 터득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정서가 미래를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후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제 막 주체성을 만들어가는 어린 존재가 누군가의 보석이 아니라 오히려 짐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생존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안정된 가정이라는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몇십 년이 흐른 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해야 절대적 약자인 ‘아이’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자세히 기억되지 않고 통으로 희미하게 기억되고 넘어가야 더 잘 견딜 수 있는 시절도 있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관계의 첫걸음인 만큼 타자성을 배우는 최초의 대상이 된다. 타자성과의 조우를 통해 주체성을 형성해 나가는데, 이때 타자화된 얼굴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윤리적인 책임감이 동반된 대상임을 인식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현해 주는 대상임과 동시에 원하지 않는 부분도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대상인 것이다. 타자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가능한 많은 부분을 지지받게 되면 학습의 자율성이 보존될 가능성이 크지만 여기에 권력이 개입하면 무력감과 그에 대한 반감이 동시에 생성되기도 한다. 놀이이든 학습이든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는 시기에 침해받은 자율성은 ‘힘들지만 좋아서 하는 일’의 정체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거기다 사회적 가치마저 부여받지 못하면 ‘힘들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 ‘시간만 낭비하는 헛짓’으로 폄훼되기도 한다. 그래서 훗날 자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하거나, 뭘 좋아하는지가 궁금하지도 않은 경우도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하게 하고 무엇을 못하게 해야 하는지 정한 후, 그것을 일관성 있게 지키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일은 가족 전체가 같이 실천해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보석이는 모두가 예외 없이 지켜야 할 룰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보석이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자주 나를 과거로 여행시켰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거기서 미처 하지 다 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 주는 행로였다. 보석이가 아니었으면 재조명되지 못했을 과거는 보석이로 인해 그전에 알았던 과거와는 다른 과거가 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 나의 예상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지기도 했다. 임시로 마감처리 해서 고이고이 묻어둔 나의 부족한 부분을 다시 꺼내 보강하기도 했고, 일정 선에서 마무리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헤쳐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만든 미래는 나만의 미래가 아니라 보석이와 내가 같이 만든 미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석이는 때로 내 인생 자체를 다시 들여다보고 재조정하게 만드는 시금석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일들 중 많은 부분이 보석이 인생에서 기억이 거의 없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성장 과정 중에 부모와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알려진 시기가 오히려 부모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