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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곰 Sep 29. 2024

가난과 불안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법(6)

5장: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그들의 얼굴조차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왕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부모님이 각자의 집안에서 막내였던 이유가 더 컸다. 부모님이 청춘의 문턱을 넘을 무렵, 세상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하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님은 그 시대의 규범을 비켜나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을 하셨다. 나와 내 동생은 그보다 더 뒤늦게 세상에 왔고, 그로 인해 내가 세상을 인식할 무렵,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이미 팔순을 훌쩍 넘긴 연세였다. 친척 형들과 누나들이 내 또래 자녀들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우리는 세대의 간극 속에 놓여 있었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내가 어릴 때 이미 80을 넘기셨고, 그중에는 90을 바라보는 분들도 계셨다. 그들의 얼굴을 몇 번 보지도 못한 채, 이내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마치 유리창 너머 희미한 풍경처럼 어슴푸레하다.


외할머니와의 단 하나의 선명한 기억이 있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는 시골의 먼 길을 홀로 오르셔서 어머니를 보러 오신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시장통의 작은 단칸방에서 우리를 돌보며 고생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작은 시장통의 단칸방에 무거운 짐을 들고 나타나셨고, 딸의 삶을 엿보며 아무런 말씀 없이 그 밤을 보내셨다. 아침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외할머니는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눈물을 훔치셨다. "할머니, 왜 울어요?" 하고 천진난만하게 물어보던 어린 나의 말에, 외할머니는 아무 대꾸 없이 내 작은 손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셨다. 평생을 농사일에 바쳐 굵고 거친 손이었다. 그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던 외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당신의 막내딸이 홀로 먼 곳에서 고생하는 모습, 도시의 낯선 풍경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자책했을까. 외할머니의 손길은 내 손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고단함과 먼 길을 돌아온 당신의 추억을 매만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친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더욱 희미하다. 다만,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하셨다는 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버지는 열 명이 넘는 자식 중 막내였고, 10대 초반에 돈을 벌기 위해 타지 생활을 시작하셨다. 그 후 고향을 자주 찾지 못했기에, 할아버지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셨다. 그 많은 자식들 중에서도 아버지를 향한 마음은 유독 특별했던 듯하다.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일제강점기의 상흔으로 얼룩져 있었다. 부모님을 잃고, 어린 시절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고 들었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셨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꺼내는 것은 집안의 금기였다. 그래서 아무도 할아버지에게 그 시절에 대해 묻지 않았다. 90이 넘으신 나이에, 한국어보다는 지나가던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더 잘 알아듣곤 하셨던 건 지금도 기억난다. 나와 동생을 비롯해 손자, 손녀, 증손까지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우리의 이름이라도 기억하셨을까.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기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추억은 마치 사라져 가는 그림자처럼 점점 흐려지지만, 때때로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게 만드는 것은 그 희미한 기억들이다. 외할머니의 거친 손길, 할아버지의 멀리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할머니의 그 깊은 주름 속 눈물. 그들은 모두 흘러간 시간 속에 있지만, 그런 순간들이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세상의 온갖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리는 언제나 따스하다는 사실이다. 그곳에는 이름도, 정확한 얼굴도 없는 희미한 기억들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내게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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