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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Nov 17. 2024

감자전과 고추장아찌

  작년에 엄마의 텃밭에서 수확한 고추가 너무나 달고 맛있었기에 올해도 기대하던 중이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분명 같은 품종이라고 심으셨다는데 모양이 유난히 길고 과육도 질긴 데다 요즘 신조어로 ‘맵찔이’ 가족인 우리가 그냥 먹기에는 조금 매웠다.


  저 많은 고추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장아찌로나 담그자 했는데 날도 덥고 귀찮음이 스멀스멀… 간장을 끓이지 않고 장아찌 담그는 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주 쉬운 방법이 있었다. 바로 간장, 식초, 미향을 1:1:1로 섞어 부어주는 것. 이걸 공유해주신 분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년을 가도 변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신 거라고 한다. (일반적인 맛술이 아니라 미향으로 대놓고 상품 이름을 적은 건 조금 덜 달기 때문이라며 양 조절에 참고하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일단 적은 양으로 시험해 본다. 1주일 후, 먹어본 맛은 매우 훌륭했다. 짜지도 달지도 않고 아주 상큼했다. 고민 해결! 인플루언서님, 복 받으실 거예요.


  사실 장아찌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힘들게 담근 사람 보람도 없이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다가 버리기 일쑤다. 하루 이틀 먹을 만큼 덜어 작은 그릇에 담아 보이게 두면 자주 꺼내먹게 된다. 남자와 나는 간장의 감칠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활용을 잘하는 편이다.


  아주 맵지 않은 고추장아찌는 잘게 잘라 피자나 파스타, 햄버거 같은 음식을 먹을 때 피클 대용으로 쓰는데 한마디로 계속 집어먹게 되는 맛이다. 케이퍼 대신 샐러드에 뿌려 먹어도 맛있고 국수나 떡국에 고명으로 올려도 잘 어울린다. 전이나 만두를 찍어 먹어도 기름의 느끼함을 잡아주면서 감칠맛이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전과 함께 먹는 것인데 여름에는 제철인 감자전이 제격이다. 포슬포슬한 감자도 맛있지만 거칠게 갈거나 가늘게 채를 썰어 부치면 아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이도 저도 귀찮고 입맛 없을 때는 찬물에 밥 말아서 척 올려 먹으면 된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세 끼 매일 먹는 음식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치던 추억과 삶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와 나의 첫 데이트(?) 장소는 서울 신촌의 전을 파는 작은 술집이었다. 30대 중반쯤 동창회에서 만난 후 가끔 연락하던 그에게 술이나 한잔하자 먼저 제안을 한 건 나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신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내게도 신촌은 상경 후 처음 살게 된 곳이어서 익숙했고 20대에 단골로 드나들던 전집도 적당히 시끌벅적하면서도 아늑한 곳이었기에 개인적인 첫 만남에 적당했다.


  그는 영업직이어서 바로 퇴근할 수 있었는지 늦은 오후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양복이 잘 어울리는 그였지만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신촌에서는 조금 튀었다. 나름 자부하는 맛집에 데려갔는데 그는 안주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날 과음을 해서 술이나 기름진 음식이 당기지 않았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무리를 한 것이라고 한다. 동창들 이야기, 일 이야기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고, 꽤 긴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던 것 같다.


마흔넷이 되어서야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1년의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했다. 남자는 오래 다닌 직장을 미련 없이 그만두고 내 곁으로 왔고, 본격적으로 소를 키우기 전까지 죽을 팔면서 알콩달콩 달콤한 신혼을 만끽했다. 어느 늦은 여름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손님은 없고 입은 궁금했던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을 감행했다. “막걸리 한 잔씩만 할까?” 그는 신이 나서 막걸리를 사러 가고 나는 냉장고를 뒤져 감자와 당근을 꺼내 전을 부쳤다. 주방에 몰래 숨어 손님이 오나 안 오나 살피면서 서서 먹는 막걸리는 꿀맛이었다. 다행히 저녁 시간까지 손님은 없었다.


  고추장아찌는 나트륨 함량이 높아서 한 번에 많이 먹는 건 자제해야 하지만, 고추의 좋은 성분들이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효과가 증폭되어 약이 될 수도 있다. 고추의 비타민 C는 면역력을 강화해 주고, 캡사이신은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고 체온을 높여주며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한다고 한다. 또한 식욕을 돋우면서 소화를 돕고 위장 내의 유해균을 죽이고 배변을 원활하게 하며 정력 증진과 시력 보호, 통증 완화에도 좋다고 하니 오늘은 냉장고 구석에 박혀 있는 장아찌를 한번 꺼내보셔도 좋을 것 같다.


  우리 부부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함께 했던 감자전과 고추장아찌로 저녁을 대신해 보려 한다. 이제는 고추장아찌처럼 톡 쏘는 그때의 설렘과 환희는 빛을 잃었지만, 함께한 세월 속에 익어가는 구수한 감자전 같은 부부의 정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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