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가을이면 집 앞마당에 굴러다니던 노란 늙은 호박이 기억납니다. 9월에서 10월 사이,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을 때쯤이면 할머니는 늘 말하셨죠.
"호박 하나 따 오너라."
저는 마지못해 마당으로 나가 가장 잘 익은 호박 하나를 툭 떼어 베란다 구석에 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게임에 빠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호박은 그저 커다란 노란 덩어리일 뿐, 그 안에 담긴 깊은 맛과 시간의 추억은 몰랐죠.
하지만 할머니에게 호박은 그저 식재료가 아니었습니다. 삶을 담고, 계절을 품은 소중한 선물이었으니까요.
호박이 집으로 들어오면 할머니는 부지런히 속을 파내고, 잘 익은 씨앗은 햇볕에 바짝 말려 두셨습니다. 호박살은 길게 썰어 반은 말리고, 반은 그날 바로 배추와 함께 김치로 담그셨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만든 김치는 오래 두어도 잘 쉬지 않았어요.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던 어느 날이 생각납니다. 부엌에서 들기름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더니 할머니가 말씀하셨죠.
"호박지 지져 먹자."
큼지막한 냄비에 호박지와 칠게장을 넣고 들기름을 두른 후 자작하게 끓여내면 집안 가득 깊은 향이 퍼졌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을 “지져 먹는다” 고 표현하셨는데, 아마 김치가 검어질 때까지 자글자글 끓여내던 그 풍경을 담은 말이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저는 호박지의 진한 향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떠올려보니 그 향은 참 그리운 추억이었습니다. 그 시절 할머니의 손맛과 따뜻한 가을의 풍경이 오롯이 담긴 향이었으니까요.
날이 추워질수록 뜨끈한 호박지를 지져 밥에 싹싹 비벼 먹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아마 그건 단순한 입맛의 기억이 아니라, 따스했던 옛날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늙은 호박은 세월을 견디며 단맛을 품고, 호박지는 추억을 지지며 깊은 맛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일까요? 할머니의 부엌에서 풍기던 그 따뜻한 냄새가 문득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그 시절의 맛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