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대기 종료

엔지니어로서 첫출발

by 역마자

IMF 사태로 인해 졸업 후 바로 취업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새로운 회사에 취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 1년은 거의 백수처럼 지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회사들이 채용을 중단하거나 축소했기 때문에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 기간 동안 프로그램 교육을 받으며 스킬을 쌓았고, 가끔 단기 계약직 업무를 하기도 했다. 수많은 면접을 보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찾아 나섰다.


그 후 6개월은 일본 본사를 둔 한국 지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되었다.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 했고, 어떤 날은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몸도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피로가 쌓여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원래 취업 예정이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졸업할 당시 여러 회사에 합격을 해 놓은 상황이었고, 최종 선택의 순간에 한국에서 가장 큰 대기업을 선택했다. 그래서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더라도 내 입사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1년 6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회사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회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다.


입사 후 신입사원 교육을 한 달 동안 받고 현업 부서에 배치되었다. 내가 속하게 된 부서는 반도체 공정 중 하나인 Etch(식각) 공정 파트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군대와 다를 바 없었다. 공장은 24시간 가동되었고, 업무도 대부분 교대 근무로 이루어졌다. 매일 야근이 이어졌고, 드문 날에 야근이 없으면 회식이 잡혔다. 회사는 내 개인 생활을 완전히 잠식해 버린 듯했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었다.

처음에는 잠실에 있는 부모님 댁에서 출퇴근했으나, 1주일이 채 되지 않아 팀장이 기숙사 생활을 권유했다. 아니, 사실은 압박에 가까웠다. 팀장의 말은 단순했다.

"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미혼 직원이 가까이 있어야 바로 달려올 수 있다."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이 생겼지만, 결국 남들처럼 기숙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니 생활 패턴은 더욱 단조롭게 변했다. 회식이 끝나도 더 이상 통근버스를 탈 필요가 없어졌고, 일주일 내내 회사와 기숙사만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에 한두 번 부모님 집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이 생활은 마치 또 다른 군대였다.


H계열사였던 회사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던 것처럼 군대식 조직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사무실 회의실에는 재떨이가 있었고, 회의 중 담배를 피우며 토론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업무 분위기는 매우 권위적이었다. 상사의 지시는 절대적이었고, 반론을 제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관리하는 장비에서 문제가 발생해 공정 진행을 중단시켰었다. 미팅 시간에 생산 부서에서 강하게 항의했고, 나는 내부 규정에 따라 사고 방지를 위해 장비 가동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팀장은 생산 차질이 생길 경우 상사로부터의 질책을 우려해 오히려 나를 비판했다. 아무도 내편을 들어주지 않는 상황이라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


한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충동이 들었다. 회사 이발소는 머리를 못 자르기로 소문이 났었지만, 분한 마음에 퇴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회사 이발소에 달려가서 "머리를 짧게 잘라주세요"라고 요청했다. 10분 후 이발이 끝났지만, 거울을 보니 좌우 머리 길이도 맞지 않고, 모양도 이상했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다시 좀 다듬어 달라고 했지만, 자를수록 더욱 이상해 보였다. 나는 화가 나서 머리를 완전히 짧게 밀어달라고 했다. 결국 스님처럼 머리를 밀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모두들 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고, 며칠간 다들 나를 피하는 듯했다. 1달 남짓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돌아이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달쯤 후에 부서 회식이 있었고, 팀장은 "너 반항하냐?"라고 물었지만, 나는 웃으며 "아니요, 답답해서 그냥 잘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입사 후 2년쯤 지나 회사는 다시 어려움에 직면했다. 중국 회사에 일부 사업부가 매각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중국 회사는 엔지니어도 함께 요청했고, 입사 2년 차 신입 사원들이 매각 대상 사업부로의 이동 대상으로 거론되었다. 또 한 번 뒤통수를 맞고 세상의 냉정함을 몸소 체험했다. 조직에 있어 꼭 필요한 인원이 되기 위해 남들보다 다룰 수 있는 장비를 늘렸지만, 야근 시간만 늘었을 뿐이었다. 위기의 순간이 오자 결국 또 나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다행히 부서 이동은 없었지만, 이미 마음은 떠난 상태였다.


어느 날,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중 한 동기가 서울에서 영업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해서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고, 아는 지인의 추천으로 영업 부서로 옮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 나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몇 달 뒤, 나는 어학 성적과 인사 기록 조회를 거쳐 정식으로 영업 부서로 발령받았다. 기존 부서에서는 반대가 많았지만, 매각 사건 덕분에 부서장님은 미안했다고 하며 바로 승인을 해 주었다.


서울로 이동하면서 4년간의 엔지니어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시기를 돌아보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인생이 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기가 오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늘 변화와 위험을 대비하고, 더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마음 한편으로 씁쓸했지만, 이것이 현실인걸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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